어느 궁벽한 날의 사냥 이영식

by 진순희




어느 궁벽한 날의 사냥


이영식



구더기(Ver)*는 시를 짓지 않는다


시를 모르지만, 똥물에서 오글거리거나 썩은 시체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들 속에는 시(Vers)*가 있다


주름 접었다 펴는 게 기표의 전부인 듯 머리 치켜세우고 엉덩이 실룩실룩 꼬리로 밀어 가며 써 가는 문자,


구더기에 미궁이란 없다


지상의 가장 낮고 궁벽한 곳에서 고물고물 발원한 문장이 오체투지로 이어진다


서로 뒤엉켜 밀고 밀리며 똥구덩이 벽을 기어오르다가 빙글 옆으로 구르는 놈은 오자 같고 뚝 떨어지는 놈은 탈자 같다


모든 부패의 고리에 탯줄을 댄 페이소스, 고래로 구더기의 문법이고 지극함이다


식탁 위에 앉은 파리대왕, 음 ―구더기들의 우상이시다


밥 한 알갱이 빌어먹겠다고 덤벼드는 목숨에게 신문지 접어 일격을 가하는 나는 파리를 잡는 것인가 시를 잡는 것인가


딱! 적중이다


좀 더 야만스럽게 쓰지 못한 구더기들의 생애가 방점 하나로 요약된다


*불어로 'Ver'는 구더기, 'Vers'는 시.




―이영식 시집, 『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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