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김치

엄마가 외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by 미냐

나는 익은 김치보다 금방 해서 풋내가 나는 김치를 좋아한다. 파김치도 오이소박이도 그렇다. 특히 열무김치는 더욱더 그렇다. 방금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슬렁슬렁 넘기며 옥수수를 둔 밥에 열무김치를 먹었다.


며칠 전 결국 코로나에 걸려버렸던 엄마를 살피러 갔을 때 엄마가 준 열무김치다. 엄마는 그걸 싸주면서 "대충 했어, 대충. 열무가 싸길래. 홍고추도 갈아 넣지 않고 고춧가루만 넣어서 대충"

됐다는 내입에 기어코 간을 보라며 열무김치를 넣어주곤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는다.

"근데 말이야, 딱 우리 엄마가 한 것 같아. 외할머니 맛이 나."

엄마 입에서 "우리 엄마"라는 낱말이 발음되는 것이 얼마나 이상하고 좋은지 덜컥 겁이 다 났다. 기억하는 동안 외할머니를 말할 때 엄마는 "외할머니"라고 말했었다.


엄마 손에 나는 외할머니댁에 자주 맡겨졌었다.


지금은 아파트촌이 되어버린 곳에 할머니의 복숭아, 포도 과수원이 있었고 어린 내 눈에는 지평선 끝까지 논이, 집 근처에는 젖소를 키우던 커다란 우사가 있었다. 기껏해야 다섯 살이었을 나는 집안의 장녀였던 엄마의 작은집 사촌들 (이모와 외삼촌들)의 과도한 조카 사랑 속에서 지냈다. 아직도 나는 할머니 이모들과 더 늙은 외삼촌들에게 반말을 하며 어리광을 부리고 그 노인들은 아직도 나를 스무 살 애 보듯 예뻐하고 신기해한다.


외할머니는 남매뿐인 엄마의 유일한 남동생이 버스 운수사업과 볼링장과 마지막 세운상가의 공구 대리점을 차례차례 몽땅 말아먹는 동안 내내 늙기만 하다가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결국 우리 집 근처에 셋방을 얻어 오셨다. 나는 어쩌다 다투면 동생 편을 드는 엄마보다 할머니가 좋아서 툭하면 거기에 가 있곤 했다.


어느 날 외숙모가 사놓은 새 전집 책을 읽느라 저녁밥상에서 눈은 책에 두고 밥은 어디로 넣는지 마는지 하고 있었다. 외삼촌은 그때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아빠가 겨우 밀어 넣은 회사에서 툭하면 결근을 반복하며 할머니의 근심이 되어갔다. 무슨 일인지 할머니가 무어라 말을 하고 갑자기 외삼촌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놀라서 할머니를 보니 텅 빈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가 그대로 스르륵 옆으로 쓰러지셨다. 숟가락을 든 채, 입에 밥알이 들어 있는 채로.


외할머니는 과수원도 논도 목장도 다시 찾지 못하고 쓰러진 지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자식들 서운할까 봐 딱 삼일 고생하시고 가셨다"며 외할머니가 뭔가 장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 덧붙여 "나도 저렇게 가야 되는데"라고도.

내가 아홉 살이었으니 엄마는 삼십 대 초반이었다. 어린 내게도 엄마가 하는 말이 좋은 건가 해서 나도 죽을 때 딱 삼일만 아프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엄마보다 더 사랑했던 외할머니라서 나는 외할머니란 말만 들어도 한동안 눈물이 터지곤 했다.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가 그때의 외할머니보다 크게 어리지 않을 거다. 이런 생각이 들면 그때의 할머니들은 왜 그렇게 금세 늙어버렸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십 서넛 먹은 나이였을 뿐인데.


하나도 익지 않아 심심하고 씹을수록 짭조름한 열무김치 한 접시를 밥 반공기를 먹으며 다 해치웠다. 아식 아삭해서 식감이 아직도 입안에 남아 있다. 익은 김치만 먹는 식구들이지만 외할머니 맛이 나는 이 열무김치는 냉장고에 두고 익히지 않은 채로 혼자서 야금야금 먹을 거다.


저녁은 차돌과 버섯 양파, 고추는 많이 애호박과 두부를 넣고 자작하게 강된장찌개 끓이려고. 쓱쓱 열무 넣고 강된장 넣고. 우리 외할머니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