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고기전골
비가 이렇게 퍼붓는다고?
시간에 맞춰 내려갔다가 일층로비 창에서 퍼붓는 비를 보고 다시 올라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에 수영을 다녀올 때만 해도 가랑비 같았다. 너무 높아서 집에서는 비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좀 젖어도 티가 덜 나는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짧은 장화를 신고 다시 나섰다. 삼십 초도 되지 않은 시간에 말 그대로 쫄딱 젖었다. 드라이한 머리와 화장한 얼굴에 물이 뚝뚝 떨어지고 무릎과 팔은 물론이고 엉덩이와 등이 축축하다. 젖은 옷이라 버스에서도 앉지 못하고 서 있었다. 약속장소에 가니 에어컨의 찬 공기가 젖은 피부를 파고든다. 춥다. 팔에 닭살이 돋고 절로 이가 부딪친다.
식당의 대기표를 뽑고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이런 날은 불고기다.
볼록한 황동불판에 금방 자른 얇은 소고기와 버섯과 파를 담아 굽다가 아래에 고인 달달한 육수를 적셔가며 먹는 맛. 고기가 익는 동안 하얀 공깃밥에 육수를 끼얹어 팽이버섯과 한 입 먹고 살짝 익어가는 열무김치를 집어 먹는다. 양념에 절여지지 않은 생고기는 부드럽고 고소하다.
아, 당면이 빠졌다. 육수와 당면을 추가한다. 투명해진 당면이 달달한 육수를 잔뜩 머금었다. 이때야, 얼른 먹어. 친구에게 덜어주고 내 접시에도 욕심껏 담는다. 쫄깃하고 달콤한 이 맛. 이제야 몸이 풀리고 옷도 다 말라간다. 밥을 남은 국물에 말아 익지 않은 겉절이와 깨끗하게 비웠다. 러시라는 말이 딱 맞았던 우리들의 브런치, 서로 얼굴을 보고 깔깔 웃었다. 이제 양보할 수 있어. 더 먹어. 이런 농담을 해가면서.
눈이 왔었나, 작은 아이가 아직 걷지 못할 때 아이를 둘 씩 안고 밀고 옆집 살던 언니(남친이라 부르는)와 집 근처 불고기집에 갔었다. 둘의 남편들은 늘 늦고 우리는 우리집이나 언니집에서 애들을 같이 먹이고 놀리곤 했다. 파김치가 되어 내가 우리도 나가서 무언가를 먹자고 했고 유모차에 아기띠에 무장을 하고 눈길을 나섰다. 눈은 펑펑 오고 우리는 아직 어려서 추운 줄도 모르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 손에 눈뭉치를 들려준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발이 어는 줄도 모르고 길 건너 갈빗집에 도착했다. 신발을 벗기고 아기띠를 풀고 애들을 단속하고 한바탕 부산을 떨고 불판이 있는 고깃집 바닥에 앉았다. 국물이 바글바글
끓는 불고기전골을 시켜 아이들을 밥을 말아 먹이고 우리도 상추에 고기를 싸서 입에 넣느라 바빴다. 눈은 그칠 생각이 없고 차가운 사이다를 눈치 보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서로에게도 권하면서 미끌거리는 당면을 젓가락질했다. 양념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잘 먹지도 않던 음식은 그날로부터 영혼의 음식 같은 것이 되었다. 식당가를 돌다가 이구동성 메뉴일치를 본 것은 우리 둘 다 바로 그날밤이 떠올랐기 때문일 거다. 국수전골을 시키려던 다른 친구의 말을 듣지 않고 불고기를 시키기 잘했다고 우리는 눈만 보고 그 겨울밤의 풍경을 처음부터 모두 기억했다.
다시 애들을 단속하고 얼어붙은 눈길을 걸어 807동 1003호와 1004호였던 각자의 집에 돌아가서 어찌 잠이 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다음날 아침에 또 우리는 서로의 문을 열고 마주 앉았었던 것만은 분명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