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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냐 May 03. 2022

오후의 맥모골

아, 살겠다

    커피 드려요?

     아이고 그래, 얘. 커피 좀 줘.


    아침과 점심을 다 먹으면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해서 그릇들을 넓은 쟁반에 행주를 깔고 엎어 놓는다. 행주로 싱크대의 물기를 닦고 보리차를 올려 놓고 분홍색 고무장갑을 뒤집어 창가에 걸어놓고 거실로 나온다. 비스듬히 소파에 누워계시거나 뭔가를 만지작대며 노는 아이의 옆얼굴을 들여다 보시다가 혹은 소파테이블에 늘상 있던 꽈배기나 피자빵 같은 걸 드시다가 어머님은 반색하시곤 했다. 처음에는 가스레인지에 늘 올라 있는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겨자빛이 나는 세발짜리 타파웨어 용기에서 커피 한 스푼 반, 설탕 두 스푼 반, 크리머 두 스푼을 크게 덜어 손잡이가 도자기로 된 장미무늬 티스푼으로 돌돌돌 섞어 내어 갔다. 좀 지나 테팔에서 새로 나온 전기주전자를 사서 가져갔고 얼마후 부턴 삼발이 타파웨어 대신 마트에서 산 백개 짜리 맥심 모카골드 커피믹스를 씽크대 하부장구석에 늘 떨어지지 않게 두었다.

    특별히 싫은 소리, 나무라는 일도 많지는 않았지만 어머님은 또 특별히 나를 보며 웃거나 크게 칭찬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아침 점심 식사 후 커피를 타서 드리면 손에 묻은 꽈배기 설탕을 톡톡 털어내시곤 받아서 뜨거운 그것을 요령있게 불어 바로 한모금 드시고는 바로 "아 살겠다!" 라고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셨다. 방금 내가 당신께 드린 것이 기쁨이라는 듯이. 어제는 좋아하시던 맥심커피와 꽈배기를 사서 산소에 다녀 왔다. 남편에서 똑 떨어진 커피믹스를 부탁했더니 노란색 맥모골이 아닌 화이트골드를 사왔다. 어머닌 노란색인데!

산소 앞에 놓인 형광오렌지빛 조악한 가짜꽃이 거슬리는 만큼 아마도 어머니는 저 커피가 맘에 드시지 않았을 것 같다.


    노란색 맥심 모카 골드

오래된 내집에서 살 때 오전 열 한시쯤이면 복도 청소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얼른 커피를 타서 들고 나갔다. 꼭대기층이라 아주머니는 옥상으로 얼라가는 계단의 미끄럼방지 주물의 색을 내느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거나 빗자루로 내 창문 아래 베고니아나 제라늄, 로즈마리의 꽃잎들을 쓸고 계셨다. 처음 계셨던 분은 무척 오래 하셨었는데 나도 아이들이 어려서 정신도 없고 낯도 많이 가릴 때라 명절에나 적은 돈을 슬쩍 드리는 것 밖에 못했고 두번째 오신 아주머니와는 커피잔을 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아주 잠깐이나마 나누곤 했다. 그 뜨거운 걸 얼마나 빨리 드시는지. 아주머니는 오래전에 당한 사고로 코가 거의 없으셨다. 항상 알록달록한 머릿수건에 손톱에는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손가락에도 알반지와 금반지를, 화장도 얼마나 예쁘게 하시는지 눈썹은 늘 반듯하게 갈매기를 그렸고 볼도 발그레, 입술도 촉촉하게 루즈를 바르고 계셨다. 다시 건네 받은 컵에 선명하게 묻어 있는 붉은색 루즈 자국을 보며 즐거웠다. 오월이 되면서는 맥모골 두 개를 적은 물에 타고 찬 우유를 붓고 얼음을 넣어 라테로 즐겼다. "아 살 거 같네" 라고 벌컥벌컥 마시고 얼음 하나를 볼이 튀어 나오게   넣고 "새댁 고마워"라고 또 총총히 계단을 내려가시며 닦으셨다. 그만두실 때까지 나는 늘 새댁이었고 그만두시는 날엔 일부러 벨을 누르고 찾아 오셔서 고마웠다고 일을 더 하고 싶지만 정년이라 못한다고 인사를 하시고 가셨다. 나의 맥모골 친구 아주머니는 그 후로 두 번이나 바뀌었다.

   받는 이마다 커다란 느낌표로 "살"게 하는 마성의 커피, 맥모골.

    나는 커피 타는 게 즐거웠다. 받는 이가 누구든 내가 그이에게 준 것이 커피가 아니라 저마다 가진 어떤 기쁨과 닿아있는 것 같았다. 돌려받아 든 빈 커피잔을 들고 돌아설 때마다 얼굴에 한동안 웃음이 머물렀다. 잠시 더 행복했다.

    이사 온 아파트에도 분명 청소하시는 분이 계실텐데 아직 마주치지 못했다. 바깥의 소리는 바로 내게 닿지 않는다.

    오랜만에 혼자서 맥모골을 타서 마신다. 달고 밍밍하고 맛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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