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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냐 May 03. 2022

나의 가장 귀한 것

우리들의 연대

화요일에는 친구네 집에 갑니다. 지난 가을 이사를 하고 나서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나의 옛동네로요. 나는 지난 가을까지  어느 유럽의 도시이름을 가진  공원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 보고 살았습니다. 공원의 꽃들이 피고 떨어지는 것을 보며 걸어가 그녀집에 앉아 함께 그림을 그리곤 했지요.

    긴 겨울을 보내고나서 다시 가는 길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늘 씩씩하고 귀여운 친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나는 궁리를 합니다. 빵집에 들러 갓 나온 밤식빵을 사갈까? 여드름쟁이 총각네 카페에서 어제 볶았다는 케냐원두를 사갈까? 봄밤에 마실 화이트와인을 사볼까? 흠, 꽃집에 들린다. 버터플라이, 얇고 여린 노란 꽃의 이름. 나비라니, 팔랑거리며 제 마음대로 꽃과 나무, 풀잎들에 실컷 날아 앉는 예쁜 것. 아아, 버터플라이의 커다란 꽃묶음이 마음에 들어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미술선생님은 나를 불러 미술을 전공해보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나는 누가 눈치를 준 것도 아닌데 돈이 많이 든다고 생각한 그것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집이 어려웠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빛이 나고 멋있는 것, 비싸고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은 왠지 양보해야 할 것이라는 어린 생각때문이었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늘 차별없이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동생을 안고 버스에 타 나만 다른 자리에 앉히고 어딘가에 갈 때 나는 왜 오는 잠을 꼭꼭 참고 남동생과 함께 앉은 엄마의 등을 그렇게 쳐다보았을까요, 할머니가 다락에서 미제과자를 꺼내 동생 입에 넣어주고 입술에 검지를 올리며 웃는 모습을 왜 보지 못한 척했을까요?  


     언젠가 모임에서 어떤분이 자신의 딸이 입학하기 힘든 영재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곧바로 오빠가 고3인데 계집애가 먼저 나댔으니 아들의 입시가 걱정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의 말을 듣고 '성질머리 고약'한 딸이 악을 쓰며 데굴데굴 구르더란 말도요. 또 고개를 끄덕거리던 모임의 몇몇 얼굴들도요.

    어쩌면 우리는 늘 적당히 잘나야만 하는 존재였을지 모릅니다. "기가 세다"라든가 "남자 잡아먹는다" 라는 말은 그래서 익숙합니다. 남자들이 억울하다는 듯이 내뱉는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냐"는 말도 익숙합니다.  늘 가장 좋은 무엇에 대한 양보를 강요받았는데 강요한 그 "누구"도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한 사실이 없는데도 스스로 앞줄을 양보하고 뒷줄에 섰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이야기는 부끄럽습니다. 이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의 당사자인 우리들만 아는 것이어서 더욱 부끄럽습니다. 이 감정이 분노가 아니라 부끄러움인 것이 끔찍합니다.

나는 가슴 속 깊은 방에 없어지지 않고 선택의 문제에 설 때마다 주저하게 만드는 훈련된 양보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서  손잡지 못하게 하고 작지만 삶을 여러 번 흔들었을 갈라치기에 대해서요. 누구나 알 수 있는 커다란 상처가 아니라도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와서 근육처럼 붙어 있는 머뭇거림에 대해서요. 그러다가 어느날 나보다도 커져버린 차별이란 이름의 고통앞에서 어쩔 줄 모르게되는 우리들에 대해서요.


    "페미니즘도 단순히 말하면 ‘공정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필연적인 저항‘이지 않을까."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임경선


    사실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었던 어린 내게 물감을 짜주고 붓을 빌려준 친구는 미대입시가 끝나자마자부터 아동미술학원에서 알바를 했습니다. 화가가 되고 싶었을 지도 모르는 친구에겐 똑같이 미술을 전공한 연년생의 남동생이 있었거든요. 전업주부인 우리는 아마도 여러번 제 마음에 멍이 드는줄도 모르고 자라난 "착한" 딸이었을 겁니다.


나는 이제 내가 욕망하는 것을 꺼내려고 합니다. 사랑의 대상을 내쪽으로 돌려보려고 합니다. 금요일 저녁 남자 셋과 함께 먹을 치킨의 다리도, 예매한 극장의 제일 좋은 좌석도 머뭇거리지 않고 가져보려고요. 이렇게 하찮아보이는 작은 욕망들이 근육이 되어 자연스럽게 유연하고 단단해질것을 믿는 마음이 되어서요.


우리들의 연대는 생각보다 간단할 지 모릅니다. 그것은 방금 나온 빵과 하늘거리는 꽃묶음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쩌면 어느 무엇보다 귀하고 빛나는 것을 들고 친구에게 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치마와 치마와 치마와 치마


말들이 오글거리는 입속

말들이 자라났다 사라지는 입속

쉬이 죽었다가도

이내다시 태어나는 말들의 붉은


입속은 그 스스로를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축축한 속살로 스스로를 두르고


태어나라 꺼져라 다시 일어나라

말하지 않고 모르는 얼굴로

얼굴 없는 그 명징한 얼굴로


뜨거워졌다가 식었다가

밤과 낮과 시침 사이와

오후의 모든 틈들에 있다

저곳과 여기와 아무데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은 듯

폭 넓은 치마와

치마와 치마와 치마와 치마


치마들을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

입 속 깊이까지 줄 서 있는

말들을 향해 인사 건네는

도처에 치마 안쪽에서

지치지 않고

마중나오는 불빛들

한줌의 낭비도 없이

공중에서 만나


무엇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 , 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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