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미냐 May 11. 2022

부모라는 게 그렇게 되는 줄 아니



삼십 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의 어린이날 용돈이 도착했다. 엄마는 아빠의 사망 연금을 나오던 날로부터 지금까지 쓰지 않고 모은다. 예전에는 펄쩍 뛰며 엄마에게 다시 돌려보내곤 했지만 재작년부터는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다.

나도 엄마처럼 한 푼도 쓰지 않고 계좌에 모아 놓는다.  언제나처럼 한참 카톡을 주고받고 "좋은 날"이라고 인사도 했는데 다시 또 톡이 온다

"4월에 한 건진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병원으로 전화해 일아봐 달라"는 것이다. 이제는 귀가 어두워진 엄마의 입과 귀가 되고 손발이 되는 일, 바로 나가봐야 하지만 엄마의 예민한 불안을 이해하기에 바로 전화를 해 발송 여부와 도착 예정일을 묻고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전화기 밖으로도 엄마의 얼굴이 보인다. 겨우 안심했겠지.


    살뜰한 보호자가 갑자기 사라진 날로부터 엄마의 삶은 살아내 버티는 것이었다.  삶은 신기하리만큼 놀라운 투쟁이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던 92년의 겨울, 사흘간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  사람의 부재가 주는 당황스러운 막막함. 엄마와 나는  달동 안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안에서 정물처럼 지냈다. 유족보다  슬퍼하던 온갖 친척과 지인들이 방문한 후에 계절이   정도 바뀌고 나서 늦은 밤과 새벽을 리지 않고 보증  돈을 대신 변제하라는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적도 없고 어디에 어떻게 인감이 돌아다니고 있는지 매일매일이 새로울 지경이었다. 사기와 보증으로 형편이 어려워졌어도 나는  젊은 날을 살고 있었다. 엄마도 당시 돈을 벌고 있던 내게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예금을 통째로 날리고 집과 차를 팔고 살림을 줄여 이사를 하는 것으로 불행이 모두 막음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이후 나는 얼마간 모아둔 돈으로 사귀고 있던 남편과 결혼을 했고 내내 엄마는 그것을 두고두고 미안해했다.

    엄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그때의 고단함을 불과 몇 해전 임종을 앞둔 사돈에게 처음으로 고백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직도 그날 병실에서 오래오래 이야기하던 엄마와 어머님이 생각이 난다. 병실의 창문이 빨갛던 그 시간에 엄마는 웃으며 집으로 가셨다.

     엄마가 저녁 늦게 가고 난 후 어머님은 다른 말 없이  "엄마가 참 훌륭하신 분이다, 참 어려우셨겠더라" 고 넌지시 말하셨을 뿐이었다. 이후 오래 병실에 계셨던 어머니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렇게 알게 된 것의 대부분은 내가 전혀 모르는 일들이었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미안하다며 누구도 모르게 돈을 벌고 쓰지 않는 것으로 버티며 살았다고.

"그렇게 어려운데 왜 엄마는 제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깜짝 속았다는 배신감과 미안함, 말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쏟아졌다. 속이 너무나 상해서 나도 모르게 어머님 앞에서 원망하는 말을 쏟았다.  


     "얘, 부모란 게 그렇게 되는 줄 아니? "

어머님도 더 말씀이 없었다.


    엄마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누군가와 소통을 해야 하는 일에 특히 겁을 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카톡을 보낸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을 하고 치과에 다니고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나와 동생에게 보내고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병원에서 건진을 받는다.


    엄마의 보호자인 나와 동생이 있지만 불편한 것을 물으면 언제나 "잘 있다"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부모라서 말하지 않는 무엇이 또 있지 않을까. 분명 그럴 것만 같다. 또 언젠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까 봐 나는 겁이 난다.


    "아빠가 주는 용돈"이라고 찍힌 계좌를 본다. 이번엔 그냥 모아두지 말고 애들이랑 남편에게 한턱내야겠다. 아빠라면 그랬을 거다, 생색을 내듯 웃으며 그랬겠지.

"이거 누가 사준 거야, 응?"

작가의 이전글 밋밋한 즐거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