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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냐 May 18. 2022

빨간 다라이

사라지지 말아라

    중학교 담장과 마주 보는 좁은 길에는  커다란 고무다라이가 여러  놓여있었다.  안에는 대파와 양파, 무청이 매달린 무와 배추들이  단씩 수십 포기씩 다듬어지고 있거나 초록색 호스에서 쏟아져 나온 물에 씻기고 있었다.  절여져서  늘어진 배추더미가 쌓여 있기도 하고 어쩔 때는 배추 대신 사과나 감과 같은 과일이 붉은 다라이속에  젖어 있던 아주머니의 파란 장화와 어울리게 담겨 있었다. 가끔 아주머니는 일을 하다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공간에 뒤돌아 서서 빨간고무장갑을 한쪽만 벗은 채로 담배를 피우곤 했다.


    신청한 책이 도착했다고 해서 도서관에 가는 길.

   

    그 가게가 사라졌다. 양념이 거의 없는 콩나물에 새빨간 낙지볶음이 함께 나오던 집, 자주는 아니었어도 여러 번 짭조름한 콩나물국을 마시며 매운 낙지를 먹었었다. 직접 담근 물김치도 배추김치도 시원했다. 사라진 식당 자리엔 학원이 들어오기로 한 모양이다. 커다란 간판이 먼저 달려있다.


    낡고 오래된 것들은 어디로 갈까. 어딘가에 남은 것이 있을까. 고무다라이가 있던 뒷길로 가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혹시라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에 서서 혼자 두리번거리게  까 봐서.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기 전에, 그러니까 아직  식당이 문을 닫은  눈치채기 전에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건널목을 건너 사진관 옆의 그 집이 그 집이 아님을 알고부터 나는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오십 살쯤 먹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막연하고 무감각한 뿌옇기만 한 기분. 눈물이   같은데 나지 않고 그냥 지나가고 싶은데 그렇게 되질 않았다. 유리문 앞에 서서 거기 비친 낡은 내 모습을 마주 보았다.

    어째서 내가 사랑한 것들은 쉽게 사라질까. 직접 담은 김치를 내놓는 오래된 식당과 학교 앞 좁은 계단 위의 카페가 그랬고 좁은 돌담길이 토막토막 잘려 난 제주의 뒷모습이 그랬다. 또 까만 기와 위에 민들레가 피던 우리집이 그랬다.


    낡은 것들은 반질거리는 새것에 밀려 남아나질 않는다. 친구들과 처음 막걸리를 마시던 종로의 피맛길도 아빠 손을 잡고 들리던 서점들도, 아빠도.

마음의 모양을 알고 있던 정든 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사라진 곳에는 주소조차 남아 있지 않으니.  이러다가 나는 이 세상이 사라질까 봐 겁이 난다. 남겨지는 것은 두렵다.

길이 든 내 부엌에 기름 냄새가 진동한다. 해가 지고 있는 창가는 붉고 푸르다, 오래전 여행 중에 사 온 레이스 커튼은 바람에 조금씩 흔들린다. 꽃병의 다섯 송이 장미는 목을 가누지 못하고 시들어 가고 저 건너편의 방에서 이십여 년 전에 낳은 아이가 무엇인가를 쓰느라 두드리는 자판소리가 들린다. 여기 있는 것들아 사라지지 말아라. 조금만 사랑할 테니, 사랑의 넓이를 늘리는 대신 내가 조금 더 빨리 오래될 테니.

나를 두고서 먼저 사라지지 말아라.

사랑은 오래되어도 낡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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