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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냐 May 24. 2022

내게 아직 남은 연애

은혼식이라니요

    겉이 까맣게 변한 아보카도를 썰었는데 아직 딱딱하다. 분명 익은 것의 모양과 색을 하고 있었는데. 겉만 물렁해졌을  안쪽은 그렇지가 않다. 충분히 시간을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한 날을 기념해 본 적이 있었나. 첫 해가 되던 날 그랬던 것 같다.  큰 아이가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 아마도 한밤중에 돌아온 남편을 위해 음식을 하고 저녁도 참고 기다렸을 거다. 오전에 백화점 셔틀버스를 타고 나가 좋은 셔츠를 사 왔고 카드를 썼고 큰 아이를 임신 중이던 나는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까맣게 잊어버린 남편과 서툴게 차린 저녁을 먹었고 설거지하는 사이 남편이 소파에서 잠이 들었던 게 기억난다.


    밤마다 말소리에 깨어  돌아보면 남편은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 알겠습니다...." 그런.

밤새도록 꿈속에서도 근무 중이던 남편은 몸이 굳을 만큼 긴장한 채로 식은땀을 흘렸다. 깜짝 놀랄 만큼 베개가 젖어 있었다. 다른 것으로 베개를 바꿔주고 서성대다 잠든 날이 많았다.


    스물여덟, 스물일곱이었으니 둘 다 애기들이었다.  

어색하고 서툴렀다. 아무 때나 시어른들이, 가끔 한국으로 출장을 나온 아주버님이 호텔 대신 우리 집에 머물렀다. 성실하고 착하지만  "아들"이던 어린 자는 남편으로서   아는  없었다.


    결혼은 나 혼자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세계에 편입되는 일이었다. 꼼꼼하고 거대한 세계. 환대는 아니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인생이 불행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은혼식이라는 이름이 붙은 기념일이라서 그런가 나도 모르는 감정이 들었다. 기쁨보다는 슬픔에 가깝지만 또한 안도되는 기분이었다.

불운할지도 모르겠던 시간을 지나서 그렇게 이십오 년이 지났다.  


생각해보면 남편은 연애하는 내내 그러니까 우리

 뿐이었을 때는  괜찮은 남자 친구였다. 순하고  선량했다. 정신없이 경고장이 붙는 와중에 은행을 찾아가고 집을 파는 일을 도왔다. 그 자신도 아직 학생이었다. 그 힘든 시간 나를 한 번도 부끄럽거나 초라하게 만들지 않았다. 불행했으나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결혼을 결심했다.

 

    모르는 날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나 흘러버렸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다시 둘만 남으면 우리 , 이번에는 천천히 연애를 마저  하고 싶다. 시간이 하는 일들을 내버려 두고 함께 보면서.

서로 괜찮다고 말하면서, 따뜻한 손을 잡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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