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의 모습
혈압약이 떨어져서 병원엘 갔다. 지난번에 건강검진결과서를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몇 달이나 잊어서 오늘에야 들고 갔다. 혈압은 여전히 높고 검진결과서를 보던 선생님은 췌장낭종 크기가 작지 않은데 왜 영상촬영을 안 하냐고 걱정했다. 사실 육 개월에 한 번씩 추적검사 해야 하는 걸 벌써 3년째 일 년에 초음파 한 번 찍는 걸로 때웠다. 진료실을 나가는데 다시 한번 꼭 ct 찍으라고 당부한다. 괜히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혈압은 또 두고 볼 수 없어서 약의 용량을 두 배로 늘렸고 집에 오자마자 큰 병원에 진료예약전화를 했다. 하루종일 대기음이. 집에 올 땐 괜찮았는데 병원 전화기를 붙잡고 같은 기계음의 안내를 듣고 또 듣고 있자니 점점 우울해졌다.
나는 사춘기 때부터 대중목욕탕도 수영장도 안 간다. 엄마 하고도 중학교 입학 이후로 목욕을 같이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사춘기 이후로 다른 사람의 몸, 특히 성인 여성의 몸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님, 입원실의 시어머님의 몸을 보기 전까지는. 어머님은 얼굴도 몸도 동글동글하고 하얗던 분이었다. 첫 입원에서 환자복의 단추를 채워드리며 보았던 동그란 몸은 몇 주새 납작해져 버렸다. 거의 쇄골까지 볼록 올라와 있던 젖가슴은 새카맣게 변한 유두가 아니었다면 그런 게 있었나 싶을 만큼 쪼그라들었고 여느 중년여성처럼 둥글던 배와 허리, 허벅지는 누워 있으면 세수를 해도 될 만큼 움푹 들어가 쭈글거렸다. 췌장암이었다.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카페나 식당, 극장이나 공원에는 나이 든 여자들이 많았다. 이야기를 나누면 모두 그저 나와 다를 바 없는 마음이었고 나는 늘 엄마처럼 나이 든 여자들이 좋았다, 교회에 가도 또래의 집사님이 아니라 권사님들과 더 많이 어울렸다. 나이가 많다는 건 그뿐일 뿐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주름 진 얼굴과 손등, 휘어진 다리와 가느다랗게 숱이 적은 머리칼. 내게 그것은 늙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벗은 몸이란.
늙은 여자의 몸은 온 힘을 다해 늙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어머님을 혼자 보낼 수 없어 목욕탕에 따라가서 보았던 늙은 몸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병들지 않아도 옷 속의 몸은 늘어지고 파이고 구부정하게 시들어있었다. 젊음보다 더 선명한 늙음의 모양.
아무 일도 없겠지만 한 세대가 떠나버리고 나니 이제 슬슬 내 차례가 다가오는구나 , 늙음이라는 말이 가까이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곡차곡 봄이 오느라 어제보다 조금씩 환한 오늘 같은 날씨에도 괜히 현관 앞을 지키고 있는 우산처럼 우울했다. 늙는다는 거 병든 다는 게 다 나쁘기만 하겠냐만 우울함은 이렇게 또 기억해두려고 한다. 부스러지고 구겨지는 기분. 산수유꽃이 살짝 벌어진 오늘의 엄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