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끓이기
시어른들 댁에 매주 가던 때 얘기다. 신발 벗고 들어가 제일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은 큰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이고 빨래대에 널린 수건을 걷어 개는 일이었다.
끙끙대며 가스레인지에 엄청나게 큰 주전자를 올리고 그게 끓으면 두 손으로 내려 비척비척 들고 베란다에 가 식혔다 펄펄 끓는 물이라 내리다가 뜨거운 물이 주둥이에서 새거나 튀기도 했지만 데이는 줄도 모를 때가 많았다. 적당히 식기를 기다리며 훼미리주스병을 닦는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주스병의 입구부터 손이 닦는 데까진 수세미로 나머지는 솔로. 물이 식으면 끙끙대며 따른다. 열 개도 넘는 물병들.
우리 애들과 시어른들 동서네가 오기라도 하면 밥상에 국그릇 밥그릇만 스물네 개, 형님네가 다녀가시면 또 여덟 개가 늘었다. 그야말로 끼니마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하느라 앞치마를 둘러도 옷의 배부분이 늘 젖었다. (동서는 애들하고 놀아주기도 하고 나는 내가 하는 게 또 편해서 대부분 내 차지였다)
그렇게 끓여 식힌 물은 하룻밤만에 동이 났다. 잠깐 사이에 엄청난 수로 나와 있는 물컵들이 물이 담겨 있는 채로 식탁이나 소파 같은 곳에 있으면 그게 그렇게 아까웠다.
수건도 마찬가지다. 빨고 말려 개어 놓는 이의 수고는 아무도 모른다. 각자 하루에도 몇 장의 수건을 내놓았다. 금요일밤에 가서 일요일밤에 집으로 오곤 했는데 몇 십장의 수건은 하룻밤만에 다 사라져서 나는 다 자는 밤에 나와 세탁기를 돌려 널어놓고 잠을 잤다. 주전자는 이미 불 위에 올려져 있었고.
이삼일 수건을 빨지 않았더니 저렇게 많다. 하나씩 개면서 그때 생각이 났다.
당연히 마실 물이 있고 당연히 몸을 닦을 수건이 걸리고 함부로 벗어 놓은 속옷들이 다시 서랍에 들어가 있는 것은 얼마나 하찮은가. 하지만 또 얼마나 중요한가.
하지만 그때 무거운 주전자를 들고 옮기는 일을 나보다 더 힘이 센 사람이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렇게나 쓰윽 손을 닦고 거실 바닥에 수건을 던지지 말라고 한마디만 했으면 되었다고.
그리고 지금은 나중에 또 이때를 생각하며 미련했다고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