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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냐 Dec 28. 2022

제라늄이 있던 자리

잊지 말자고



사철 꽃을 피워내던 내 제라늄이 죽었다. 겨울의 추위를 알면서도 들여놓지도 미리 보온할 것을 준비하지 못한 내 탓이다.  절로 좋아서 피어 있나 하고 그저 잊어버렸었다. 꽃이 핀 상태로 얼어 있던 식물은 처음엔 꽃집 냉장고에 들어있는 것처럼 선명히 꼿꼿했다.

날이 풀린 어느 날 반투명해져 구부러져 흩어진 제라늄. 모종삽으로 식물의 사체를 떠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밥을 먹다 맥이 풀려 얼굴을 묻고 우는 아이의 귀가 새빨갛다, 열망으로 꽃이 피던 자리에 그저 뺨을 대어 줄 수밖에.


따뜻한 겨울 오후의 흙은 보드랍고 향긋하다. 식물을 사들이던 집 앞 상가의 꽃집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고 동그란 바퀴를 달고 화분을 배달해주던 여주인의 인사소리도 텅 비었다. 그래도 혼자서 쭈그리고 앉아 여기에 다시 심을 꽃들을 헤아려본다. 처음엔 장미였다가 그랑코에였다가 국화이기도 했고 오랫동안 제라늄이었다. 옆 집 아주머니도 어쩜 사철 저리 꽃이 예쁘냐며 웃었고 세탁소아저씨도 택배총각도 제라늄과 로즈메리를 쓰다듬었다.


그 환한 냄새.

동그랗게 비어있는 땅을 내려다보며 풍길 리 없는 향기를 상상해 본다. 꽃의 사체를 주워 올리며 당분간은 아무것도 심지 않아야겠다고.

아직도 멀었다는 강추위를 대비해 은박보온재를 싸매주었다. 얼지 말라고, 여기에 아주아주 예쁜 꽃들이 피어 있던 것을 너도 잊지 말고, 나도 잊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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