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미리 하지 않기
월요일에 냉장고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점검수리 신청을 했더니 금요일이 제일 빠르다고. 그동안 급하고 비싼 재료들을 김치냉장고와 보조 냉장고에 레고블록 쌓듯이 넣었다. 다듬어 용기에 넣어둔 대파와 양배추와 치즈, 엔초비와 장아찌들과 젓갈 고춧가루.... 아직도 많은 것들이 실내온도보다 높은 냉장고 안에 들어 있다.
냉장고에는 어떻게 저렇게 많은 것들이 들어갈 수 있을까. 꺼내 놓아 보면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매일 비슷비슷한 것을 해 먹고 해 놓고 보면 별 것도 아닌 음식들인데 재료와 양념들은 왜 그리 많은 걸까.
냉장고 수리기사는 더 이상 고칠 수 없다고 돌아갔다. 새로 냉장고를 사야 하는데 붙박이로 설치된 것이라 복잡하다. 비용도 많이 들고.
어릴 때 4시쯤 되면 엄마는 나를 불러 시장에 갔다. 손으로 쥐어 만든 이북식 인절미나 꽈배기나 호떡 같은 걸 엄마랑 나눠 먹으면서 콩나물과 소고기와 생선 같은 걸 사가지고 들어 왔다. 대청마루에 떡하니 있던 냉장고에는 사실 별 게 없었다. 소화가 안 된다고 늘 숨을 끌어올려 크게 트림을 하던 할머니의 사이다와 소화를 돕는다고 엄마가 늘 밤에 끓여 식혀 넣어 두었던 감주 같은 게 기억난다.
수리기사가 돌아가고 곰팡이가 생기기 직전의 식빵을 잘라 오븐에 넣어 굽고 역시 곧 상하게 생긴 바질페스토를 꺼내 점심을 먹었다. 냉장고였던 것에 넣어 두었던 와인을 따라 마셨다.
이렇게 간단하게 먹으면 냉장고가 필요 없을 텐데.
뭘 해 먹겠다고 미리 사 두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바쁘다는 친구를 미리 배려한다고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상황이 좋지 않을까 봐 내내 머릿속으로 걱정하면서도 먼저 전화하지 못한 내가 잘못한 것 같다. 뭘 그렇게 미리 생각하고 또 준비하느라 그 아이를 혼자 두었나 싶다. 냉장고 가득 쌓인 식재료들처럼 너무 많은 사정과 순간을 상상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모든 게 의미 없고 가족을 챙겨야 하고 말하고 싶지 않을 거라고 미리 내 마음은 염려로 가득했다.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에게 무심함으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지우고 또 지운다고 말로만 하고 내내 사로잡혀 있다. 곰탕을 그 아이집으로 배송시키고 싶어 주소를 내려다보고 몇 번씩 다른 친구에게 묻고 싶어 전화부를 본다. 어쩌면 그 아이와 나의 관계는 곰팡이가 생기기 직전일지도 모른다. 곧 상해서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는 순간일지도.
오늘도 아침부터 내내 생각한다.
냉장고를 없애는 일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