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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냐 May 21. 2023

그럼 나는 뭐였을까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감정

리모컨을 배 위에 올려놓고 남편이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팔을 흔들어 깨워 방으로 들여보내고 혼자서 떠드는 티브이를 끄려다가 어느 연예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에 보지 않는 프로그램인데 그녀가 내뱉은 ”저는 힘들지 않았어요, 저만 참으면 되는데 “라는 말이 선 채로 리모컨을 쥐고 있던 나를 주저앉혔다. 몇 해전 그녀가 남편손에 엘리베이터에서 질질 끌려 나오던 영상이 떠올랐다.

두 아이를 우유에서 금방 꺼낸 것처럼 키워내고 먼지 한 톨 없이 외국잡지에나 나올법하게 집안을 가꾸던 그녀였다. 그녀는 얼마나 예뻤던가. CF모델로 전성기이던 열아홉에 나이 차이가 나는 남자연예인과 결혼을 하고 아이들과 남편 없이는 방송활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경력이 단절되는 것보다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돕는 것이 더 귀한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집에서 뽀얀 아이들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산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폭행 사건은 충격이었다. 결국 떠들썩하게 이혼을 하고 한동안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얼마 전부터 간간이 딸과 티브이에 나오는 가보다 했다. 환갑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 그녀는 예쁘고 발랄했다. 어제 나를 주저앉힌 그녀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불행해 보였다.

그런데 그 불행의 원인이 전남편과의 분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린 그녀를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집안에 가두어 놓고 제왕처럼 군림한 남자다.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칭찬한 번 받기 힘들었고 세상의 어떤 존재보다도 그에게 인정받고 그의 마음에 드는 일이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고 했다.

“그것도 사랑이었어요. 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는 일이 최우선이었어요. 내가 참았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텐데 이혼하게 만든 아들과 딸이 원망스러웠어요 “라고 말하는 그녀가 한심하고 바보 같아야 하는데 한숨을 쉬며 그녀를 쳐다보는 패널들과 달리 나는 너무나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오은영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성장시키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럼 내 모든 삶이 다 잘못된 건가요" 동의를 얻지 못한 그녀는 흔들렸다.

아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내게 너무나 익숙하다.

시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나는 내 일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더는 병원밥이 싫으시다는 시어른의 식사를 들고 갈 곳이 없고 주무르고 씻기고 시중들고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었던 사람이 사라진 것은 세상이 사라진 것과 같았다. 나는 허등대고 길을 잃은 사람처럼 공허했다. 길을 걷다가도 눈물이 터졌다. 하루에 몇 킬로씩 혼자 걸었다.

남편도 친구들도 수고하고 애썼다고 위로하다가도 마음을 잡지 못하는 내게 냉정하게 충고하곤 했다. 내 삶과 젊은 날들을 아까워하라고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위해서 살라고.

그때 나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에 가까스로 말했었다.

“그럼 내가 살아온 그 시간들이 모두 아무 가치도 없다는 거냐 “ 고.

주저앉아 보던 나는 그만 어찌할 바 모르는 표정의 그녀를 꺼버렸다.

빈 꽃병이 놓여 있는 테이블 위를 가만히 보았다, 꽃병은 거기에 꽃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장미였다가 버터플라이, 데이지였다가 공조팝이었던 꽃들. 결국 시들었지만 온 힘을 다해 환하던 꽃들의 표정.

꽃병은 비었어도 아름답다. 꽃병이라는 이름만으로 꽃이 꽂혀 있었던 시간을 차곡차곡 기억하는 내가 있으니까.  꽃이 꽂혀 있느라 꽃병에는 물때가 생기고 자국이 남기도 했다. 빈 꽃병이 깨끗이 비워지고 물이 마르는 시간, 늘 몇 개라도 남던 물자국이 마른 천으로 닦여 반짝거리는 데까지는 몇 번의 수고가 필요하다. 몰아붙이지 않고 텅 빈 감정을 추스릴 시간이 나와 그녀에게도 조금 더 필요할지 모른다.

새삼스레 꽃병에게 위로를 받고 잠이 들었다. 내일은 꽃을 사야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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