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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냐 Aug 09. 2023

뜻밖의 가을

여름 속의 입추

입추는 여름 한가운데에 있다.  긴 장마가 끝이 나고 비틀어 짜면 다시 비로 내릴 것 같은 물기가 공기에 가득한 어느 날에 절기는 온다.  중복이니 말복이라는 말 사이에 슬그머니 들어앉는다..

나무 끝은 햇빛에 덴 듯 누렇게 바래고 배롱나무의 분홍색도 희미해진 채로 분분히 떨어져 있다.  이맘때면 태풍소식이 간간이 들려온다. 두렵고도 걱정스럽지만 사실, 태풍 전날의 하늘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바람이 쓸고 간 공기는 또 얼마나 깨끗한가. 그런 날은 남산이나 북한산 같은 서울 시내의 산들이 거실 유리창에 붙어 있는 듯 가깝다. 귀신같이 눈치 빠른 이가 알아챌 만큼 이른 아침의 바람은 조금 서늘해진다. 비와 바람이 햇빛을 흩뿌리며 지나가는 날은 무지개가 크게 색을 그리며 드리우고 층층이 피어나는 구름을 감상하느라 새삼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덥다는 말이 수없이 뱉어지는 날일수록 지는 해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늘은 가늠할 수 없도록 넓고 변화무쌍하고 밝고 빨갛고 어둡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여름의 한가운데 어울리지 않게 끼어든 입추의 언저리, 며칠 째 폭염특보니 열대야라는 말을 듣는다. 어쩌면 그건 폭설주의보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습기 가득한 공기는 뿌옇고 뜨거운 낮의 가운데로 나가려는 마음에는 결심이 필요하다. 실내에 발이 묶여 그저 차가운 음료를 마시고 마시는 시간. 여름을 사랑하는 나 같은 사람마저도 그늘로만 살금 거리며 걷는 날들이다. 아무리 추운 날이어도 녹아 무너지는 눈사람처럼 얼음을 한가득 넣어 만든 커피의 컵 표면으로 물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고 손바닥이, 조심상 없는 치맛자락이 젖는다.

그럼에도 햇빛이 달구어 놓은 돌멩이들은 아름답고 바스러져가는 개망초들은 애틋하다.

아, 이번 여름은 틀렸다는 생각을 한다.  내 생애의 여름이 이미 나를 떠나고 말았음을 알아버렸다.

내게 가을을 사랑할 마음이 남아 있으려나. 그것은 가을에 알아봐야겠지.

어제, 입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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