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어서와요. 미국은 처음이지?
”엄마, 혹시 아빠랑 싸웠어? “
일요일 아침 7시반, 불안하고 초초한 얼굴의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나는 수원에서, 엄마와 아빠는 천안에서 각각 공항리무진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 3층 출국장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아침 일찍 공항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우리 딸”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느라 엄마, 아빠는 조금 피곤해보였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활짝 웃으며 상냥하게 말을 건네는 엄마, 아빠였다.
하지만 어쩐지 이상했다.
분명히 날 보며 웃고 있다. 하지만 미묘하게 뭔가 쎄한 이 기분.
‘ 아, 두 분 싸웠나? 그런건가? 망했다 ‘
엄마는 마음 숨기는 것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고, 난 늘 쉽게 알아차리는 편이었다.
엄마가 내게 숨기고 싶은 것은 늘 아빠와 다투고 나서 속상한 엄마의 마음이 아니었던가?
딸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 비록 엄마는 아빠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딸이 그런 아빠를 미워하지 않을 바라는 그 마음.
무려 17박18일동안 떠나는 미국여행인데.
싸우지 않고 무사히, 그리고 건강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라고 빌고 빌었는데,
어쩐지 출발도 하기 전에 두 분은 다투신 모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가족여행을 하며 싸우지 않는 가족들이 과연 있기는 한거냐고
가장 편한 사람들이고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다. 하지만 가족여행을 떠나본 사람들은 문득 깨닫게 된다.
‘내가 과연 가족에 대해 알고 있기는 했던걸까? ’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 대해 사실은 함께 동호회를 하는 친구보다 몰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아는 것은 쥐뿔 하나 없으면서도 이해받기만을 바라는 이상한 관계.
어쩐지 시작부터 삐그덕거리는 이 상황에 조금은 마음이 상하려던 참이었다.
“아니, 어제 아빠가 개한테 물렸는데, 병원을 가라고 했는데 병원도 안가고 엄마한테 화만 버럭 내잖아 ”
아니 개에게 물렸다고?
어떤 개한테?
어쩌다가?
얼마나?
그나저나 병원을 가자는 엄마한테 도대체 왜 화를 낸거지? 아빤?
온갖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싸운 것은 아니라서 일단 다행이다.
하긴 두 분은 원래 싸우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일방적으로 아빠가 화를 내고 엄마가 속이 상하는 것이 우리 집의 전통인데, 이건 엄마, 아빠가 싸운 상황보다 더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다 작은 개에 마주친 아빠에게 개가 갑자기 달려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정이냐고 묻는 엄마에게 아빠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고 하는데, 그런 아빠를 상상하는 일은 그리 생경한 일은 아니다.
내일 당장 새벽에 미국으로 떠나야하는데, 혹여라도 못가게 되면, 혹시라도 딸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면,
이런 생각들로 스스로에게 화가 났음이 분명하다. (물론 그 화는 보통 가장 약한 존재인 엄마에게로 향하기 일쑤다)
개에게 물려는데, 상처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도 안하고 17박18일의 미국여행을 떠나려고 공항에 그냥 왔다니,
광견병에라도 걸리면?? 어떤 세균에라고 감염이 되면?? 상처가 덧나면?? 도대체 어쩌려고??
여행을 시작도 하기 전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별거 아니야. 쪼끄만 개가 지나가다가 콱 물었어. 이빨 자국은 났는데, 근데 괜찮은 것 같아 ”
개 주인에게 연락처도 받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약을 발라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이럴땐 본인이 하기 싫은 것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하지 않아버리는 아빠의 고집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어쩌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그냥 이대로 떠나도 되는 것일까? 미국은 치료비도 엄청 비싸다던데.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도대체 어떻게하지??
가족여행에 평화만 있기만 바랬던 나의 마음은 역시 욕심이었던 것인가??
시작부터 이렇게 삐그덕거리면 이 여행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온갖 생각들로 머리가 엉망이 되어 가고 있던 그때, 생각이 났다. 인천공항에는 병원이 있다!
17년이나 제약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구나 지금 시간은 8시. 병원은 8시 30분 오픈. 비행기 시간은 10시.
공항에 여유있게 도착했고, 다행히 아직 출국심사를 받기 전이었다.
첫 진료를 보고 게이트로 가면 충분하다. 늦지 않는다. 이제 바랄 것은, 부디 개에 물린 그 상처가 심하지 않기를
“어떻게 오셨어요? ”
“어제 아빠가 개에 물리셔서요….. ”
“네??? 개에 물려요?? ”
그래서 선생님, 공항에 와서 개에 물렸다니요…어이가 없으시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간호사에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다행히 대기 없이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다행히 상처는 생각보다 깨끗해요.
하지만, 개의 입속에는 온갖 세균이 있을꺼고 혹시라고 감염이 시작될 수도 있어요. 소독해 드릴꺼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약을 처방에 드릴께요. 여행가셔서 꾸준히 드세요 ”
오 하나님! 천만다행이었다.
개의 이빨 자국은 선명했지만, 개가 ”콱“하고 문 것치고 상처가 덧날것 같지는 않다는 의사의 말이었다.
엄마는 늘 아빠는 살성이 좋아서 상처가 나도 쉽게 아문다고 했었는데,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아빠 어때?? 병원 들러서 여행내내 먹을 약도 얻었고, 상처를 소독했고, 여행내내 소독을 할 소독약도 구매했으니 편히 떠나면 되겠다 그치?? “
가족여행에 닥친 시련 하나가 이렇게 클리어 됐다.
병원을 들릴 시간이 없어 그냥 비행기에 올랐다면, 매일매일 얼마나 불안에 떨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아빠의 개에 물린 이 사고가, 여행의 모든 액운을 막아 줄 액땜이었을지,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바랬다.
멍멍아 제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나쁜 일들을 다 가져가줘 .
무사히 출국을 했고, 무려 13시간을 날아 뉴욕 JFK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셋이 함께 떠나는 가장 오래떠나는 여행이다.
내가 회사를 다닐 때는 아주 가끔 엄마, 아빠와 여행을 떠났다. 일년에 몇개 안되는 휴가를 쪼개 써야 했던 여행이기에 패키지로 길어야 7박 9일 여행을 함께 떠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자유의 몸이 된 나는, 많은 시간은 엄마, 아빠와 여행하는데 쓰려고 하고 있다.
긴 미국여행을 떠나기 위해, 지난 봄 5박6일의 일본 자유여행을 테스트했다.
과연 우리는 싸우지 않고 긴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는 여행동반자일까??
72살의 엄마는 미국을 가고 싶다고 했고, 76살의 아빠는 미국은 정말 가기 싫다고 했다.
언제나 아빠에게 맞춰 줬던 엄마는 드디어 할 말을 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아니 도대체 언제까지 본인 가고 싶은 나라만 갈 꺼예요??
난 이스라엘도 가기 싫었어. 대만도 그랬어. 이집트도 그랬어 그치만 자기가 가고 싶다고 해서 다 같이 갔잖아요.
한번쯤은 양보를 해서 내가 가고 싶어하는 곳도 같이 가줘야지. 난 미국이 가장 가고 싶다고! “
엄마가 몇년을 설득해서 겨우 성사된 여행이었다.
모든 액운을 다 가지고 갈 사고와 함께 시작된 여행이었다.
부디. 아무런 사고 없이. 아무런 다툼없이 무사히 이 여행을 끝나고 돌아올 수 있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