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뒤바뀐 세계

직장 내 괴롭힘, 열 번째 이야기

by 난주

지 팀장의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와 엘리베이터 벽면에 붙은 <올바른 복장 규정>을 번갈아 보며, 한 이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수백 개의 스팽글로 뒤덮인 원피스.

엉덩이 부분까지 징이 박힌 청바지.

어깨가 훤히 드러난 오프숄더 니트.

개성 있는 직원이 많기로 유명한 디자인실에서도, 지 팀장의 패션은 단연 눈에 띄었다.


네 달 전 합류한 지 팀장은 현란한 의상만큼이나 디자인실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업무 능력이 부족한 그녀를 보필하느라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팀원 두 명은 이미 퇴사를 선언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벌이는 술자리를 충당하느라 부서 경비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한 이사였다. 디자인실을 총괄하고 있는 그녀는 바닥부터 경력을 다져 온 베테랑으로 현재의 디자인실을 만들고 꾸려 온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얼핏 보면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의외로 정이 많고 세심한 부분이 있어 직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 팀장의 등장 이후 한 이사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렇다 할 경력이나 역량도 없이 하루아침에 요직으로 발령이 난 지 팀장은 쉴 새 없이 사고를 쳤고, 한 이사는 이를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더 큰 문제는 직속상관인 홍 상무를 비롯해 유관 부서장인 김 이사와 박 이사까지 입을 모아 지 팀장을 편드는 것이었다.


홍 상무: 지 팀장 혼자 식사하는 거 알고 있어? 앞으로는 그런 일 없게 각별히 신경 좀 써.

김 이사: 어제도 지 팀장 야근하는 것 같던데.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에요?

박 이사: 지 팀장님 보면 안쓰러워요. 열심히 하는 데도 겉도는 것 같아서.


임원들의 말속에서 한 이사는 가해자로, 지 팀장은 피해자로 뒤바뀌어 있었다. 사고만 치는 지 팀장을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감싸는 모습에서 한 이사는 본능적인 싸함을 느꼈지만 판은 이미 짜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실과 감사실에서 한 이사를 호출했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가 들어왔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홍 상무는 민감한 상황이 외부로 새어나갈까 봐 열심히 입단속을 시켰지만 한 이사가 억울하게 조사받고 있다는 소문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사님이 왜 조사를 받아? 팀원들 괴롭힌 건 지 팀장이잖아."

"지 팀장이 선수 친 거지."

"자기가 잘못해 놓고 이사님한테 덮어씌우는 거야?"

"알면서 뭘 물어. 사장이 시켰을 수도 있고."

"사장님이? 왜?"

"정말 몰라서 그래? 지 팀장이 사장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

"진짜야? 그럼 지 팀장 보호하려고 이사님한테 저러는 거야?"

"모르고 당하는 이사님만 불쌍하지. 임원들도 다 한 통속이래."


그간의 상황을 눈앞에서 보아온 디자인실 직원들은 모두 한 이사를 지지했지만 김 사장의 지휘 아래 촘촘하게 짜인 게임판에서 그녀를 구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완강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조사는 한 이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그녀는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라는 오명을 쓰고 부장으로 강등되었고, 이후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회사를 떠났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한 이사는 그동안 당한 괴롭힘에 대한 증거를 샅샅이 모아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한 이사의 자리를 노리던 지 팀장은, 퇴사를 앞둔 직원들의 신고로 또 다른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부적절한 관계를 무기 삼아 기세를 떨치던 그녀는 소문의 확산을 두려워한 사장의 지시에 의해 유관 부서로 전출되었다.


조직을 키운 자는 무고히 희생되었고 조직을 탐낸 자는 목적했던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악의와 탐욕이 뒤섞인 이 세계에서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는 지금도 계속 뒤바뀌고 있다.


언젠가 처절한 패배를 겪었던 한 이사가 부활하고 회사를 우습게 보았던 김 사장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날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여기는 모든 것이 뒤바뀌는 곳, 바로 직장이니까.



본 사례는 여러 사람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인물이나 회사를 식별할 수 없도록 각색되었습니다.













keyword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