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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포위

직장 내 괴롭힘, 아홉 번째 이야기

by 난주

김 과장: 진짜 짜증 나. 자기가 무슨 정의의 사도인 줄 아나. 회의실 불러 깨더라.

이 과장: 업체 때문이야?

김 과장: 응, 납품도 안 끝났는데 왜 돈부터 주냐고. 자기가 확인할 때까지 결재 올리지 말래.

이 과장: 저러니 팀장한테 찍히지. 일만 잘하면 뭐 해. 넘어갈 줄을 모르는데.

최 대리: 차장님 때문에 괜히 저희까지 찍히는 거 아니에요?

김 과장: 아, 몰라. 팀장이 밥 먹자고 해서 잠깐 나갔다 올게. 업체 미팅 갔다고 대충 둘러대줘.

최 대리: 걱정 말고 천천히 오세요.


오늘도 사내 메신저는 분주하다.

총무팀에서 잔뼈가 굵은 김 과장과 이 과장, 그리고 그들을 졸졸 따라다니는 최 대리는 상급자인 강 차장을 헐뜯느라 여념이 없다.


무려 17년 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강 차장은, 투철한 책임감과 뛰어난 업무 역량으로 총무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러나 허 팀장이 부임한 이후,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따돌림에 시달리고 있다.



허 팀장은 새롭게 전권을 휘어잡은 본부장이 데리고 온 인물이다. 경력이 훌륭해서 영입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지만 사실 본부장의 낙하산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주말마다 골프를 치며 본부 곳곳에 마수를 뻗치고 있다.


최근 허 팀장은 협력사 교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는 오랜 기간 엄수되어 온 협력사 선정 규정을 대폭 완화하고, 친분이 있는 업체들을 밀어 넣고 있다. 강직한 강 차장이 기존 및 신규 협력사를 다각도로 비교하여 이의를 제기했지만, 허 팀장은 과거에 집착하면 미래가 없다는 말로 일축해 버렸다.


그러나 이후에도 허 팀장과 강 팀장의 마찰은 계속되었다. 본부장의 신임을 등에 업고 원칙을 교묘히 피해 가는 허 팀장과 상사가 지시했더라도 부당한 일에는 타협하지 않는 강 차장 사이에서, 팀원들은 적지 않은 혼란과 피로를 느꼈다.


그 사이를 틈타 김 과장은 감춰두었던 야심을 드러냈다.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 노릇한다고, 김 과장은 강 차장을 대신해 조직의 이인자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빠른 눈치와 현란한 말솜씨를 무기로 김 과장은 동기인 이 과장과 순진한 최 대리를 꼬드겼고, 강 차장의 반격에 당황하고 있는 허 팀장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본부에서는 갑작스러운 <조직 진단>이 감행되었다. 겉으로는 조직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업무 효율과 직원 유대를 제고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본부장의 편에 서지 않는 직원들을 걸러내기 위한 조치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나갔다.



본인의 일은 잘하지만 조직을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 팀원들에게 고압적이다.

상급자의 지시에 반발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허허, 조직 진단에서 이런 의견들이 나왔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도 조직의 선임으로 모범이 되셨으면 했는데 차장님 때문에 힘든 팀원들이 많았나 봐요.

이번 조직 진단 결과에 따라 내년 인사 발령이 난다고 하니 참고 바랍니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며, 허 팀장은 강 차장을 따로 불러 조직 진단 결과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분노하거나 절망할 줄 알았던 강 차장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혹시 사직서인가요?


아니요. 제가 아파서 좀 쉬어야겠습니다.

우울증과 불안장애, 위궤양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세 달 정도 쉬라고 하네요. 조직을 생각하려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하니까 팀장님께서도 승인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쉬는 동안 팀장님께서 알려주신 업무 내용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숙지하고 오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입을 벌린 허 팀장을 뒤로하고 강 차장은 회의실을 나왔다.


앞으로 세 달.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허 팀장과 팀원들은 잘못을 돌아보기는커녕 강 차장의 거취를 궁금해하며 또 다른 작당모의를 이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강 차장에게, 배신당한 상처를 돌아보고 회사가 아닌 자신을 위해 고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것이다.



본 사례는 여러 사람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인물이나 회사를 식별할 수 없도록 각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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