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 괴롭힘에 대한 사유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시인의 <섬>은 단 두 줄 뿐이지만, 읽을 때마다 깊이 사유하게 한다.
눈을 감고 섬을 그려 본다.
망망대해 한복판, 외로이 떠 있는 섬.
그 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고 또 가로막는다.
그러나 섬과 섬이 서로 손을 잡고
작은 섬을 에워싸면
작은 섬은 완벽히 혼자가 된다.
인간은 무리 짓는 습성이 있기에, 어디에서든 집단을 이루곤 한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가장 원초적이고 기초적인 가정에서도 집단이 만들어진다.
집단은 끈끈한 결속으로 조직에 대한 소속감을 높이고 타인에 대한 신뢰와 책임을 증진시키지만 소외나 배제 같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직장 내 괴롭힘이다.
어린 시절부터 집단의 위력을 경험한 우리들은 직장에서도 똑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매년 생일파티에 초대받지 못하는 아이가 존재했듯, 직장에서도 단체 채팅방에 초대받지 못하는 직원이 생겨난다.
생일 파티와 채팅방에 초대받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괴롭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우리는 형언하기 힘든 괴로움에 직면한다.
손을 맞잡은 섬들 사이로 나의 섬과 타인의 섬을 잇던 다리가 무너질 때, 우리는 지독한 절망과 외로움에 휩싸인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팀원들에게 배신당한 강 차장.
어두운 목적으로 야합한 임원들에게 배척당한 한 이사.
그들은 모두 의로운 선택을 했지만, 그 결과는 의롭지 않았다. 현실 속 직장 생활에서 집단적 괴롭힘은 악인보다 의인을 향하기 쉬우며, 그 결과는 가해자의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생업의 근간인 직장 생활에서 의를 위해 나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더구나 집단에 맞서는 것은 개인 간의 갈등에 대면하는 것보다 훨씬 큰 용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의를 이야기하기보다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의 침묵은 비겁함보다는 두려움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강 차장과 한 이사 같은 인물이 꼭 필요하다. 한 사람의 양심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조직 문화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사람. 개인의 이득보다 조직의 의로움을 우위에 둘 수 있는 사람. 그들의 용기로 인해 우리의 직장 문화는 변화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한 이사의 결단이 조 팀장의 전출을 끌어낸 것처럼, 용기 있는 선택은 당장의 승리로 이어지긴 힘들지만 결국 조직의 물살을 맑게 하는 의미 있는 파동을 일으킨다.
직장이라는 바다 위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섬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 섬들 사이로 다리를 이을지, 아니면 끊을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편과 고독을 감내하고 용기를 내어 옳은 결정을 할 때, 우리가 머무는 바다는 한층 더 맑아질 거라는 사실이다. 하나의 다리는 또 다른 다리로 이어지고, 그런 다리들이 연결될 때 섬들은 비로소 단단한 연대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는 우리가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