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열한 번째 이야기
간밤의 대화가 맘에 걸렸는지, 아내는 출근하려는 이 대리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임신한 몸으로 매일 출근하기도 벅찰 텐데 자신까지 품어주는 아내의 온기를 느끼며, 그는 헝클어진 마음을 다잡았다.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회사가 성장 궤도에 오르던 시절, 첫 공채로 입사한 그는 인사팀에서만 7년을 보냈다. 채용과 평가, 교육과 조직 문화가 세분화된 대기업과 달리 이곳에서는 모든 인사 업무를 도맡아야 했다. 처음에는 버겁기도 했지만 그 덕에 어떤 인사 업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전문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1년 전 부임한 꼬불이의 도를 넘는 지시 때문에 이 대리는 그동안 쌓아온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허망함을 맛봐야 했다.
꼬불이.
초강력 파마약의 힘을 빌어 연출한 곱슬머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게는 부서 물품부터 크게는 부하 직원의 성과까지 자신이 손댈 수 있는 것은 죄다 슬쩍하는 배 팀장의 별명이었다.
그런 배 팀장의 레이더에 최근 걸려든 것은 정 상무였다. 창립 초기부터 자리를 지켜 온 정 상무는 인사팀을 비롯한 경영지원 부문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는 까라면 까-가 신념이자 습관인 전형적인 꼰대였지만, 한편으로는 윗사람의 지적에 약하고 아랫사람의 아첨에 흔들리는 단순한 인물이기도 했다.
사람을 간파하는 능력이 박수무당급인 배 팀장은 정 상무의 이러한 약점을 한눈에 파악하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배 팀장, 요즘 애들 취업이 어렵긴 한가 봐? 내 조카도 벌써 반 년째 백수야. 대학도 괜찮은데 나왔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나중에 시간 될 때 이력서 한 번 봐줘."
"조카분 전공이 어떻게 되시죠?"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인가? 예전 신방과 비슷한 거라던데. 요즘은 왜들 그렇게 이름을 복잡하게 짓나 몰라."
"그럼, 멀리서 찾을 것 없이 홍보팀 면접 한 번 보시죠. 안 그래도 한 명 충원 계획 있습니다."
"그건 경력직 채용 아닌가? 그리고 친인척은 추천 못하는 거 아니야?"
"친인척이라도 실력이 되면 채용해야죠. 경력직이라도 저연차를 뽑는 거니까 큰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전공도 딱 맞고요. 채용 절차는 제가 아주 공정하게 준비해 보겠습니다."
적극적인 배 팀장의 권유에 정 상무는 말없이 술잔만 만지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데. 정말 문제없겠어?"
배 팀장은 준비된 미소를 선보였다.
"일단 면접만 한 번 보시죠. 통과 못하면 불합격 통보하면 됩니다. 깔끔하게."
"그래, 그럼 면접이나 봐. 자네만 믿을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그날부터 이 대리의 수난시대는 시작되었다.
무난한 학벌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스펙이 전혀 없는 정 상무의 조카를 합격으로 이끌기 위해, 배 팀장은 이력서 검토는 물론 면접관 배치까지 모든 과정에 개입했다.
하지만 가장 큰 복병은 인적성 검사였다. 대기업 시스템을 꿈꾸는 최고경영자가 야심 차게 도입한 검사는 합격률이 50% 미만일 정도로 까다로운 전형이었다. 모든 과정이 전산으로 처리되어 결과 조작도 불가능했기에 배 팀장은 며칠을 끙끙되는 모습이었다.
"이 대리, 인적성 검사를 꼭 봐야 하나?"
"네, 회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셔서 채용 절차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지. 그런데 저연차까지 인적성 검사를 보는 건 좀 오버 아닌가? 선임들이야 리더십이나 사고력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젊은 친구들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합격률도 너무 낮아서 비효율적인 측면이 있어. 내가 상무님께 말씀드려서 3년 차 이하는 인적성 검사 없이 진행하려고 하는데 어때?"
"하지만 공채 과정에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허허, 사람이 이렇게 융통성이 없나. 공채는 회사에서 특별히 뽑는 인재들이니까 당연히 인적성을 봐야지. 하지만 수시는 달라. 상황에 따라 조정이 필요하다고. 내가 상무님이랑 얘기해 볼 테니까 수정안 좀 만들어 봐."
독실한 홀어머니 밑에서 정직이 가장 큰 가치라 배우며 자라온 이 대리에게, 배 팀장의 지시는 발을 내딛는 순간 추락하는 아득한 낭떠러지처럼 느껴졌다.
며칠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현실의 벽 앞에서 타협하는 쪽을 택했다. 곧 태어날 아기와 투병 중이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배 팀장의 지시에 따라 이 대리는 수정된 채용 안을 올렸다.
그러나 꼬불이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 상무의 조카를 입사시키는 데 성공한 배 팀장은 이번에는 파견직 채용까지 마수를 뻗쳤다. 회사 안내 데스크의 담당 인력은 늘 파견 업체 세 곳을 비교하여 면접을 본 후 선발했지만, 배 팀장은 이러한 절차를 무시하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업체를 단독으로 내세웠다.
이 대리와 안면이 있던 다른 파견 업체 대표는 배 팀장이 해당 업체로부터 금전적 이득을 취했다는 소문이 돈다며 넌지시 말을 흘렸다.
그제야 이 대리는 깨달았다.
한 번의 타협은 시작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가 지키고자 했던 최소한의 선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다.
꼬박 한 달을 고민한 끝에 이 대리는 결국 감사팀을 찾았다.
숨통을 조여 오는 좁은 회의실에서 그는 그동안의 일을 담담히 기술하고 관련 자료를 제출했다.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감사 절차가 투명하게 이뤄져 배 팀장이 처벌받을 수도 있지만, 그전에 정 상무를 움직여 감사 결과까지 은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존재한다.
이 대리의 용기를 시작으로 꼬불이의 범법적 행위는 언젠가 반드시 밝혀질 것이며, 이번 선택을 계기로 그는 어머니께서 일러주신 정직의 길로 다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본 사례는 여러 사람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인물이나 회사를 식별할 수 없도록 각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