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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구원

직장 내 괴롭힘, 열두 번째 이야기

by 난주

"이 얘기를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죠.

그래도 한 사람쯤은 진실을 알고 있으면 좋겠어요."


모락모락 피어나던 커피잔의 김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잠자코 있던 민혜가 입을 열었다. 그 후 두 시간 넘게 이어진 이야기 끝에 차 팀장이 할 수 있었던 말은 단 한 마디 밖에 없었다.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살아요."



유민혜.


대학 졸업을 앞두고 대외협력팀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던 그녀는,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만큼 청초하고 단아한 미인이었다. 젊은 남자 직원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괜히 근처를 서성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외모와 달리 우직한 그녀는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맡은 일에만 집중했다. 차 팀장과 처음 마주친 날에도, 그녀는 회의에 참석하는 관리자들을 위해 음료를 나르고 있었다.


"여덟 잔이나 되는 걸 혼자 들고 온 거예요? 이리 줘요. 내가 놓을게요."


자신은 손 하나 까닥하지 않으면서 인턴에게는 갖은 심부름을 시키는 백 팀장이 못마땅했던 차 팀장은 민혜의 가녀린 손에 들려 있던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예상치 못한 호의가 고마웠던지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민혜를 보며, 차 팀장은 집에 있는 두 딸을 떠올렸다.


그날 이후 마흔넷 차 팀장과 스물넷 민혜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연대가 조금씩 싹텄다. 민혜는 미디어마케팅팀에 들릴 때마다 차 팀장의 책상에 소소한 간식을 놓아두었고, 차 팀장은 가끔 민혜를 포함한 인턴들에게 점심을 사주었다.


입사 여부가 불확실한 인턴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서로에게 필요한 일이자 암묵적인 룰이었지만 차 팀장은 내심 민혜의 입사를 응원하게 되었다. 어쩌면 인턴을 직원만큼 힘들게 부리는 백 팀장 밑에서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 더 마음이 갔는지도 모른다.


국회부터 지자체까지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만나야 하는 대외협력팀은 외근이 많았고, 민혜는 가끔 사무실에 혼자 남아 뒷정리를 해야 했다.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종종거리는 모습에, 차 팀장은 자신의 팀원들을 불러 식사를 함께 하도록 배려했다.


백 팀장의 전화가 왔던 날도 민혜는 미디어마케팅팀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이제 막 나온 수제비를 한 술 뜨려던 순간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지금요? 네...... 알겠습니다. 있다 뵐게요."


"민혜 씨, 무슨 일 있어요?"


"팀장님이 필요한 서류가 있다고 가지고 오라고 하시네요."


"이 시간에? 그냥 메일로 보내지. 무슨 서류길래 가지고 오래요? 내가 백 팀장에게 전화해 줄까요?"


"아...... 아니에요. 급하다고 하셔서 빨리 먹고 가보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뜨거운 수제비를 불어 식힐 틈도 없이 급히 욱여넣은 민혜는 내일 뵙겠다는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떴다. 그러나 그녀는 내일이 아니라 모레가 되어도 회사에 돌아오지 않았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민혜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모르나 봐요."


"얼굴값 하는 거지, 뭐. 아무리 그래도 상무님한테 들이댄 건 선 넘은 거지."


"형편이 어렵나 봐요.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랑 동생이랑 산다고 하더라고요."


"아주 작정을 한 거네. 아유, 소름 끼쳐."


탕비실에서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차 팀장은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민혜의 갑작스러운 이탈에 대해 백 팀장은 급한 집안일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직원들의 험담을 들어보니 불미스러운 일과 관련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늦은 시간 민혜를 혼자 불러 낸 백 팀장이 수상했던 차 팀장은 그를 따로 불러 해명을 요구했지만 백 팀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집에 급한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민혜와 가까웠던 직원들이 통화도 시도해 보았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만 나올 뿐 연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차 팀장이 할 수 있는 일은 행간에 떠도는 소문이 모두 사실은 아닐 거라 믿으며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잠깐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 차 팀장은 드디어 민혜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회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한산한 카페에서 차 팀장과 민혜는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가녀린 몸이 한층 더 작아진 민혜는 작은 충격에도 바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진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시작으로 상상하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날, 나쁜 일이 있었어요. 팀장님이 부른 식당에 갔더니 김 상무님이 있었어요. 인턴 중에 저를 가장 좋게 보고 있다면서 정규직 되고 싶지 않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당연히 되고 싶다고, 감사하다고 했는데 자꾸 술을 권하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그래도 한두 잔은 마셔야 할 것 같아서. 근데 자꾸 몸이 무거워지는 거예요. 제가 주량이 약한 편도 아닌데......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술에 뭘 탄 게 아닌가 싶어요."


민혜는 입이 마르는지 다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근데 상무님이 갑자기 옆으로 오시더니 저를 만지시는 거예요. 뿌리치고 싶은데 몸에 힘은 안 들어가고. 그만하시라고 우는데 문이 열렸어요. 백 팀장님이 오셨더라고요. 하얗게 얼굴이 질려서 저를 끌고 나가시더라고요. 상무님한테 그만하시라고, 이건 정말 아니라고 하시면서 저를 잡아끌고 택시에 태워 보내셨어요."


차 팀장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었다. 대학 시절, 따라다니던 여자들에게 숱하게 차였던 설움을 이제야 푼다며 술자리에서 여직원들에게 더러운 농담을 일삼기로 유명한 김 상무가 젊은 인턴에게까지 마수를 뻗쳤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다음 날, 일어났는데 도저히 출근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오후에 전화가 오더라고요. 인사실장님과 법무실장님이 집 근처까지 찾아왔어요. 상황을 듣더니 합의를 하라는 거예요. 억울한 건 알겠지만 서로 힘든 것보다는 합의하고 끝내는 게 좋지 않겠냐고. 일을 크게 만들수록 저만 힘들어질 거라고."


피해자를 구제하기는커녕 압박하는 회사의 작태에 차 팀장은 진저리가 처졌다. 그러나 민혜는 흥분한 차 팀장과 달리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싫다고 했어요. 피해 사실이 명확한데 제가 왜 합의를 해야 하냐고. 증인도 있다고 했더니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제가 합의를 안 하면 백 팀장님이 잘릴 거라고. 잘 생각하라고......"


끔찍했던 당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힘겨운 듯 그녀는 쉼을 몰아쉬었다.


"다들 돈 때문에 합의한 줄 알겠지만 그게 아니에요. 백 팀장님 때문에 그랬어요. 저 때문에 잘리시면 안 되잖아요. 그날 택시 태우면서 팀장님이 그러셨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부르지도 않는 건데 너무 미안하다고."


민혜의 마지막 말은 한창 끓어오르던 차 팀장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차갑게 식혔다.



'민혜 씨,

회사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가장 나쁜 사람은 백 팀장입니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자기가 살려면 어느 선에서 끊어야 할지 모든 걸 계산하고 있었을 거예요.

김 상무는 지방으로 밀려났지만 내부에서는 민혜 씨가 정규직이 되기 위해 먼저 접근했고 그걸 백 팀장이 바로 잡았다는 얘기가 돌아요. 아마 백 팀장은 인사실, 법무실과도 미리 입을 맞췄을 겁니다.

결국 민혜 씨는 자신을 사지로 몬 사람을 살려준 셈이죠.'


벼랑 끝에 선 사람을 돌려세우는 건 진실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언제나 진실을 옹호했던 차 팀장은 민혜의 앞날을 위해 이번만큼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가 민혜에게 남긴 유일한 말은 과거를 지우고 미래로 나아가라는 것뿐이었다.


언젠가 민혜도 수많은 고난을 넘어 성장하다 보면, 진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막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현실을 동시에 안기는 건 여린 날개를 완전히 꺾어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녀에게 남은 최선은 추악한 현실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작은 믿음을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녀는 살아남았다.

차 팀장은 그 사실에 마지막 희망을 담으며, 커피숍을 나서는 민혜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본 사례는 여러 사람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인물이나 회사를 식별할 수 없도록 각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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