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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탐색의 쉼, 첫 번째 이야기

by 난주

침묵이 불편했습니다.


첫 만남이 낯설어 입을 떼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곤 했습니다.

한창 대화를 나누다 뚝- 끊기는 지점이 오면 어색함을 이기지 못해 이것저것 말을 갖다 붙였습니다.

다툼 후 입을 꾹 다물어버린 두 사람 사이를 말로 조율하며 중재를 하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는 것이 좋았고, 제법 능숙했습니다.

돌아보면 저의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말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말이 조금 버거워졌습니다.


부모님께 솔직한 말을 털어놓기가 어려웠고, 친구들과 수많은 말을 나누고 나면 묘한 공허함이 밀려왔습니다.

격론이 오고 가는 회의실에서 말을 꺼내는 횟수가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다 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회의를 하고, 매주 보고를 하고, 매월 강의를 하던 삶에서 벗어나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고요와 마주했습니다.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살던 사람이 집에 있으니 힘들지 않냐며 지인들이 종종 안부를 물어왔지만, 저는 고요한 시간이 생각보다 편안했습니다.



책을 무엇보다 좋아하지만 추천은 잘하지 않는데, 오늘은 한 권 소개하고 싶습니다.


말을 하고, 말을 듣는데 지친 분이라면 <침묵을 배우는 시간>을 함께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독일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코르넬리아 토프가 지은 책인데 행간마다 숨어 있는 침묵의 매력이 상당합니다.


말을 전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가가 침묵을 이야기한다는 게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막상 책을 읽고 나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소통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침묵은 말만큼이나 효과적인 소통의 도구입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침묵이 더욱 진한 감정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가만히 눈을 응시하는 연인을 바라보며 사랑을 느끼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부모님을 보며 걱정을 나눴던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겁니다.


작가는 말을 멈춘 시간이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생각과 존재의 공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침묵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관계의 본질을 보며, 삶을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침묵을 배우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말 잘하는 법만 배워 왔습니다.


부모님은 발음을 교정하기 위해 여린 입술에 연필을 물려주셨고, 선생님은 발표를 잘해야 한다며 수시로 이름을 호명하셨습니다. 그러고도 안 되면 웅변 학원에 끌려가 '이 열사'를 수십 번쯤 외쳤고, 학교 토론 수업 때는 왜 겨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열변을 토해야 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자들의 영원한 이상형인 유머 있는 남자, 남자들이 선호하는 리액션 잘하는 여자가 되기 위해 말솜씨를 늘려야 했고, 회사에 들어가서도 유재석 뺨치는 진행 능력과 발표 실력을 갖추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침묵을 배운 적은 없었습니다.


고요 속에서 나의 마음을 읽는 법.

조용히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

할 말을 고르고 때를 기다리는 법.

하던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법.


이토록 다양한 침묵의 방법이 존재하지만 한 번도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작가가 책 속에서 '침묵 조언'이 아닌 '침묵 수업'이라는 말을 사용한 건 이러한 우리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가끔 말은 홍수처럼 우리를 덮쳐 옵니다.

그 속에서 나를 지키고 타인을 잊지 않으려면 침묵을 배워야 합니다.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함께 배울 사람도 없지만 고요한 방에 앉아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형체 없는 적막이 처음에는 불편하기도 하지만 이내 그 안에서 평온함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말을 멈추니 마음이 들립니다.

주변이 조용해지니 감각이 뚜렷해집니다.


그렇게 고요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또 다른 쉼을 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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