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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팔레트

탐색의 쉼, 세 번째 이야기

by 난주

아이유의 '팔레트(palette)라는 곡을 아시나요?


보라색.

단추 있는 파자마.

립스틱.

짓궂은 장난.

반듯이 자른 단발.


아이유가 좋아하는 것들을 담아 만든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나는 뭘 좋아하지?


하지만 지극히 단순하고 원초적인 질문에 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점심 메뉴를 주저 없이 선택하고

외부 행사에 입을 정장을 바로 골라내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한눈에 파악하는

저는 누구보다 결정이 신속한 사람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재미없는 어른이 되고 정신없이 삶을 꾸려가다 보니 필요한 것에 밀려 좋아하는 것은 점점 희미해져 갔죠.


그러다 저만의 시간이 생겼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집을 나서고 나면, 해야 할 일에 앞서, 하고 싶은 일을 먼저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공기와 함께 하는 산책

1인용 소파에 앉아 책 읽기

따끈한 차 한잔과 함께 글쓰기


평범하지만 너무도 그리웠던 것들이 제 품에 돌아왔습니다.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편안하면서도 기분 좋은 설렘이 저를 둘러쌌죠. 잃었던 취향을 되찾고 멀어졌던 습관을 되살리면서 메말랐던 마음에도 서서히 작은 열정들이 피어났습니다.


그 작은 꽃들을 힘으로, 저만의 팔레트를 새롭게 채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시작은 미용실에서 이뤄졌습니다.

4년 넘게 유지해 온 긴 머리를 싹둑- 잘랐죠.


여성미가 강조된 긴 웨이브는 사실 제게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자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좋아할 수 있는 또 다른 머리 모양을 찾고 싶었습니다.


목덜미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게 잘린 머리카락은 생전 해보지 않은 자유분방한 파마와 만났죠. 이제 완연한 중년이라 짧은 파마머리를 하면 <응답하라 1988> 속 덕선 어머니 스타일로 굳어질까 봐 시술 시간 내내 맘을 졸였습니다.


다행히 결과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낯설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경쾌하고 발랄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새로운 음악을 듣는 것에도 푹 빠졌습니다.


올드팝부터 재즈, 보사노바, 클래식까지 익숙하지 않았던 장르들을 골라 들으며 매일 아침마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업데이트 되지 않았던 플레이리스트가 간만에 생기를 되찾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버킷리스트도 작성했습니다.


수십 년 만에 적는 거라 쓸 말이 없을까 봐 망설였던 것도 잠시, 30분도 한 돼 수첩 한 장이 빼곡히 채워졌습니다.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고 10년 넘게 아이를 키웠지만, 아직 제 안에는 꿈 많은 소녀가 숨어 있나 봅니다.


그렇게 저는 새로운 빛깔로 팔레트를 물들이고 있습니다.



Allegro non molto


휴직 기간 동안 함께 하고 있는 수첩 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이탈리아어 음악 용어로 '아주 빠르게 연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죠.


이 말처럼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가장 편한 속도로 멈추지 않고 차근차근 좋아하는 것들을 발견하면 됩니다.


선호하는 머리 스타일, 마음에 드는 노래, 즐겨 먹는 간식, 하고 싶은 취미를 하나씩 모으다 보면 어느새 아이유의 노래처럼 나만의 팔레트가 완성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눈곱만큼도 닮은 구석이 없는 아이유에 빙의하여 저만의 팔레트를 흥얼거리며 오늘의 쉼을 마무리지어볼까 합니다.


이상하게도 요즘엔 그냥 쉬운 게 좋아

하긴 그래도 여전히 브런치 글쓰기는 좋더라


Hot Pink보다 맑은 하늘색을 더 좋아해

또 뭐더라 폭닥거리는 수면 양말, 립글로스, 가끔 들어오는 강의비


I like it. I'm not twenty f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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