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새벽 기차에 올랐다.
코트 위로 느껴지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10호차 12D.
좌석을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전날 급히 만든 강의 자료를 손보다 멈칫했다.
일의 감각.
잊혔던 그것이 갑자기 살아남을 느꼈다.
얼마나 일을 좋아했는지
얼마나 일에 익숙했는지
얼마나 다시 일하고 싶은지
갑자기 깨달음이 왔다.
그러나 내게 다시 돌아가겠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다.
직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선사한다.
일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고
일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마련하고
일의 성과에 따른 보상을 제공한다.
부모만큼 눅진한 밀도와 학교만큼 끈덕진 접근으로, 직장은 우리를 일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동시에 직장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애정을 앗아가기도 한다. 모든 직장에는 퇴사유발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일을 방해하고
타인의 성장을 저해하고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며
그들은 직장에 기생한다.
썩은 사과 하나가 상자 속 사과 전부를 곯게 하듯 소수인 그들은 다수인 우리를 야금야금 좀먹는다.
더욱 큰 문제는 그들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음지에 숨어 자신의 욕구를 난사하는 그들은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모두가 그들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하지만 직장은 크고 작은 위험 요소를 고려해 노출보다는 은폐에 앞서고, 직원들은 나서고 싶어도 힘이나 명분을 얻지 못해 눈치만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법률과 제도가 도입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들에 대한 발각과 처벌은 요원하기만 하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고 사건이 있으면 공론화되어야 해결이 될 텐데, 어두운 곳에서만 이야기가 돌다 보니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한 현실이 갑갑하여 <퇴사유발자들>을 연재하기 시작했지만 나 역시 이런 양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이란 본디 선함과 악함이 공존하는 존재이고, 직장이란 그런 사람들이 모여 경쟁하며 생존하는 곳이니까.
그러나 이번 연재를 하며, 두 가지 측면에서 나름의 의미와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이야기를 들려준 지인들의 반응이었다.
말하고 나니 속이 후련해요.
이런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비슷한 상황의 분들이 용기를 얻길 바랍니다.
이걸 나누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다 생각해요.
제 얘기를 대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감한 이야기를 선뜻 나눠준 믿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은 나인데, 오히려 공유의 기회가 있어 좋았다고 말하는 지인들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투명하게 최선을 다해 일해 온 그들의 모습을 알기에 더욱 울컥했는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감사했던 건 독자 분들의 화답이었다.
어디나 그런 사람은 있나 봐요.
저를 괴롭혔던 상사가 기억납니다.
피해자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가해자가 강력하게 처벌받았으면 좋겠어요.
직장 내 괴롭힘이 근절되기를 바랍니다.
공감의 표현을 넘어 피해자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가해자의 처벌을 함께 고민하고 나아가 직장 내 괴롭힘과 직장 문화에 대한 생각까지 나눠주시는 독자 분들의 답글이 있어 연재를 시작한 의미와 취지를 되새길 수 있었다.
300명이 채 안 되는 구독자와
100명이 채 안 되는 좋아요로
직장 내 괴롭힘의 사례와 시사점을
널리 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 연재를 통해 직장에서 겪는 고통과 부당함이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닌 우리가 속한 사회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이것을 개선하는 것 또한 우리 모두의 몫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야기란 정체되지 않고 흘러갈 때 비로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이야기들을 흘려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작은 공론의 장이야말로 <퇴사유발자들>의 연재를 의미 있게 했다.
앞으로 이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이 전해지고 공감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무겁고 불편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꺼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받아주시고 마음을 더해주신 분들이 계셨다는 사실에 희망을 느낀다.
앞으로 나는 또 다른 곳에서 일의 감각을 곧추세우겠지만, <퇴사유발자들>의 연재를 통해 스스로 돌아보고 함께 고민한 경험들은 결코 잊지 않으려 한다. 하나하나의 작은 노력과 진심이 모여 결국 보다 건강한 직장 문화를 이루어 낼 거라는 믿음을 남기며 연재를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