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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Feb 20. 2024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릴없다'

하릴없다

추억의 노래 속 가사, 하릴없다


이 단어만 보면 저는 항상 이 노래의 가사가 떠오릅니다. 여러분도 혹시 아는 노래일까요?

                        

얼마나 얼마나 싫어할지 알면서도

이것밖에 할 게 없다

너의 집 앞에서

하릴없이 너를 기다리는 일

- 전활 받지 않는 너에게(2AM)


2010년에 발표된 노래니까 좀 오래되기는 했네요. 이 가사가 떠오르는 것은 바로 ‘하릴없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노래에 가사를 붙이는 작사가들은 시인 못지 않게 심혈을 기울여 단어 하나하나를 선택할 텐데요, 작사가가 선택한 이 ‘하릴없이’라는 단어가 그때 제겐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노랫말에 쉽게 쓰이지 않는 단어이다 보니 무언가 좀 더 시적(詩的)이고 가사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려 노래 속 주인공의 짝사랑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았어요. 과연 이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요?   

  

● 하릴없다: ①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② 조금도 틀림이 없다.

   [예] ①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으니 꾸중을 들어도 하릴없는 일이다.  

         ② 비를 맞으며 대문에 기대선 그의 모습은 하릴없는 거지였다.  

   

예상했던 뜻과 같은가요? 사전에 나와 있는 두 가지 뜻 중에서 주로 ①의 뜻으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노랫말에서도 이 의미로 쓰였고요. ①의 뜻으로 쓰일 때에는 ‘속절없다’, ‘불가피하다’와 비슷하게 쓰이고, ②의 뜻으로 쓰일 때에는 ‘틀림없다’, ‘영락없다’, ‘간데없다’와 비슷한 쓰임새를 보입니다.


발음이 비슷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할 일 없다’와 많이 혼동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러지 않으셨나요? 그러나 ‘할 일 없다’는 세 단어로 이루어진 구(句)의 형태이고, ‘하릴없다’는 띄어쓰기가 없는 한 단어입니다.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입니다. 실제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하릴없다’의 활용형인 ‘하릴없이’를 ‘할 일 없이’의 의미로 쓴 것으로 짐작되는 문장들이 많습니다.   

  

하릴없이(?) 서성이는 학생을 가출 학생으로 보고 접근

하릴없이(?) 떠나는 여행이 주는 행복감      


위 두 문장은 맥락상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이’로 쓰였다기보다는 ‘할 일 없이’의 의미로 쓰였다고 했을 때 더욱 의미가 잘 통합니다. 즉, ‘하릴없다’를 잘못 이해하고 활용형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여요.

이런 단어들이 많아 사람들이 혼동을 겪을 때 표준어 규정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세부적인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표준어 규정 제3425]

의미가 똑같은 형태가 몇 가지 있을 경우, 그중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널리 쓰이면, 그 단어만을 표준어로 삼는다.

  하릴없다의 의미로 할일없다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하릴없다만 표준어로 삼는다.


이쯤 되면 그럼 ‘하릴없다’에서 ‘하릴’은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 있는데요. 이와 같은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이 국립국어원 온라인 가나다에 질문을 했지만 “‘하릴없이’의 역사 정보가 따로 남아 있지 않아 이 말의 유래 등을 알 수가 없다.”라는 답변이 달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릴’은 독립적으로 쓰이거나 다른 단어에 붙어 또 다른 단어를 만들어 내는 기능은 하지 못하고 오직 ‘하릴없다’ 류로만 쓰이는 비자립 어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자립 어근에 대해서는 아래 코너를 참고해 주세요.     



<문해력이 쑥쑥, 한 줄 요약>

하릴없다는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 비자립 어근에 대해 알고 가세요!

비자립 어근이란 국어 문장에서 홀로 쓸 수 없는 어근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예를 들어 ‘보슬비’는 ‘보슬’과 ‘비’가 결합된 단어로, ‘비’는 단독으로 쓰일 수 있고 ‘비옷’ 등과 같이 다른 단어의 한 어근이 될 수 있지만 ‘보슬’은 다른 단어와 결합할 수 없고 그 자체로도 홀로 쓰이지 못해 단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단지 ‘보슬보슬’처럼 어근이 중복되어 부사로 쓰이거나 ‘보슬거리다’처럼 접미사가 붙어 다른 말로 파생되는 정도일 뿐이지요. 즉, ‘보슬비’의 ‘보슬’은 자립적으로 쓰이지 못하고 다른 말이 합쳐져야만 단어로 쓰일 수 있는 어근이라는 것입니다. ‘깨끗하다’의 ‘깨끗’, ‘시원하다’의 ‘시원’, ‘긁적거리다’의 ‘긁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릴’도 ‘하릴없다’에서만 쓰이고 있으므로 다른 말과 결합하거나 홀로 쓰일 수 없는 어근, 즉 비자립 어근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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