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경로를 다시 탐색합니다."

우리 곁의 무심한 언어들 2

by 구름 수집가
돌아서 왔다고 하지만 넓히다 온 거죠. 제 영역을.

- 셰프 손종원(<흑백요리사2>)
경로를 다시 탐색해 본 적 있나요?


- 나는 결혼을 두 번이나 엎었어. 한 번은 한복 맞추러 갔다가 나를 함부로 대하는 시어머니와 그 옆에서 한 마디도 못하는 남자 때문에 엎고, 또 한 번은 결혼 얘기가 나오자마자 식당으로 나와서 서빙하라는 시아버지와 여기에 동조하는 남자 때문에 엎고. 그렇다고 내가 아주 까탈스러운 건 아니야. 지금은 나 아껴주는 다정한 남편이랑 잘 살아. 그땐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도 모르겠어.


- 어느 날 갑자기 불치의 병이 찾아왔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개월의 입원을 마치고 평생 먹어야 할 약이 쌓였고 기약 없는 재활 치료도 해야 해. 잘 자고 잘 먹으면 칭찬받는 신생아같은 삶을 다시 살면서, 배송 온 밀키트를 받아서 3인 가족 저녁 먹을 식사를 차리는 일도 체력적으로 버겁지. 그렇지만 그래서 더욱 하루하루를 명랑하게 살려고 해. 언젠간 모든 인간은 죽어. 나는 매일매일이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됐어.


경로를 다시 탐색합니다.

길치에 방향치까지 더해져 나에게 네비게이션 없는 운전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면서도 네비게이션이 있으니까 어디든 새로운 길도 적은 두려움으로 찾아갈 수 있다.

네비 속 친근한 여성의 목소리는 달디달고 부드럽다. 계산된 길을 가다 신호와 교통량을 고려해 좀 더 나은 길이있을 때, 운전자의 방심으로 도로 하나를 잘못 돌았을 때에도 탓하는 말 없이 그저 침착하게 경로를 다시 탐색한단다. 우스갯소리로 남자가 태어나서 여자 세 명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할 때 네비게이션이 포함된다고 했던가. 운전을 할 때 동승자의 열 마디 잔소리보다 네비게이션의 이용 가능한, 선명한, 예측 가능한 멘트는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그래서 네비와 함께 길을 찾을 때 내가 실수로 이탈한 경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길은 언제나 어디서나 이어져있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목적지에 도착한다.


한번은 목적지를 찍어 놓고 다른 곳을 먼저 들르느라 십여 분을 돌아돌아 갈 때도 그녀는 수 십번 경로를 재탐색해 주었고, '왜 자꾸 다른 길로 가세요?' 라든가, '더 이상길이 없군요.' 같은 말은 없었다.


그러나 삶의 경로를 재탐색하는 일은 말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결혼을 두 번 엎은 그녀, 불치의 병으로 삶의 방식을 바꾸게 된 그녀들의 삶에서 저 몇 줄 문장 안에 담지 못한 이야기는 적지 않을 것이기에.


내가 걸어온 편안한 길을 벗어나야 할 때, 익숙한 관계를틀어야 할 때, 잘 아는 것을 두고 잘 모르는 것을 선택해야 할 때, 마흔 중반에 있는 나는 지금도 너무 두렵다. 그래서 편안하고, 익숙하고, 잘 아는 것에 둘러싸여 조금 불편하고 낯설고 잘 모르는 것들을 그것들대로 두고만 싶어진다. 네비가 알려주는 길 말고 때로 내가 꺾어야 하는 우회전이나 좌회전 속 시야가 더욱 새로울 것을 알지만 그러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만 하는 순간은 존재한다. 자존심 센 요리사들의 계급대결이라 불리는 요리 서바이벌 <흑백요리사 2>에서도 재탐색의 순간이 조명된다. 제한된 시간 안에서 오징어와 참외를 주재료로 냉채 요리의 소스를 만들던 흑팀의 셰프들은 '참깨' 때문에 의견이 갈린다. 참깨를 넣자는 셰프들과 그러면 너무 맛이 평범해진다는 셰프들 사이에서 일단 참깨는 부어진다. 결과는, 특징없이 무난한 그저그런 맛.


이 순간 셰프들은 결정한다.


다시, 소스를, 만들기로.


촉박한 시간 속에서 과연 옳은 결정인지에 대한 의심 속에서 그렇게 재탐색 끝에 만들어진 소스는 창의적이고 새로운 시도라는 평가 속에 주 심사위원인 안성재, 백종원의 호평을 받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대중적인 맛으로 승리를 거머쥔 백수저들의 이야기보다 나는 이 스토리에더욱 열광한다.


경로를 다시 탐색하는 일은, 우리가 길을 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경로의 재탐색은 결국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다시 세우는 여정이 될 수 있다. 길을 잃는 듯한 순간조차 나는 발견의 기회를 얻는다. 길은 어디서나 이어져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