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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야 Oct 25. 2022

술이 나를 꼬신다

박사논문계획발표, 그 후

보통 술은 순간의 분위기와 메뉴의 빈자리를 찾아 나를 유혹하지만, 때로 특정한 날의 일들이 술을 불러올 때가 있다. 왠지 오늘은 혼술이라도 한잔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날이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이들과 더 오래 머무를 겸, 전문성을 쌓을 겸 나는 몇 해전, 박사과정을 위한 연수휴직을 선택했다. 졸업을 향한 첫걸음으로 논문을 향해 공식적인 첫 발자국을 내디딘 오늘, 나는 교수님들 앞에서 연구계획서를 발표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연구주제는 유아교육현장을 다채롭게 바라보기 위해 다양한 글쓰기 기록들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2019년부터 정해진 도서를 읽고 매주 1회씩 거의 2시간 동안 함께 토의하는 스터디 선생님들 몇 분도 감사하게(♡) 응원차 강의실로 오셨다. 이미 논문계획서는 지난주에 교수님들께 드려서 내 손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발표라고 하는 행위 자체가 주는 떨림과 긴장은 숨길 수 없었다.


내향적이나 상상력이 풍부한 내 성향을 고려하여 발표 대본을 미리 작성하고 '나는 아나운서다, 나는 연예인이다'하고 주문을 걸었다. 그럼에도 학과 교수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연구계획을 발표하는 일은 숨을 짧게 만들었다. 발표에는 첫 숨이 가장 중요하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발표를 시작했어야 하는데, 내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그게 몇 초라고 할지라도) 내 선택으로 시작한 발표 시점은 폐의 크기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내 숨이 이렇게 짧았나? 이 정도 크기의 목소리와 빠르기로 말하는데 이렇게 많은 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뇌는 하나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지나간다. 발표 대본을 읽으며 파워포인트를 넘기던 생각의 틈으로 연습할 때 마스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 떠올랐다. 쌩 콧구멍으로 공기를 훅훅 들이마시는 것과 긴장한 채로 마스크의 겹을 지나 산소를 채우는 것은 너무 다른 일이다. 발표하는 동안 그 사실을 깨달으며 혼자만의 웃음이 터지기도 했고, 빨라지는 숨을 가다듬으려 마음속으로 숫자 몇 개씩을 세며 시간을 지나가기도 했다. 교수님들이 주신 피드백은 구체적으로 연구에 반영하기에 도움 되는 이야기였고, 충분한 응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연구를 통해 세상을 더 밝게 비추고픈 학자들의 마음에 닿게 되는 하루다. 나도 그런 마음을 담은 학자이자 교사가 될 수 있을까???

출처. 브레드이발소 디저트이야기 와인편

 현대인들의 여행이 직접적인 여행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여행하는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Guatari)의 말처럼 나는 오늘 큰 산 하나를 넘었다는 생각과 이미지로 술을 부른다. 내가 상상한 이미지에 신랑과 부모님이 부재하고, 어린 두 아이가 내가 중요시하는 의미보다 내 손에 들려진 쿠키세트(연구계획서 발표를 축하하며 친구가 준 선물)에 대한 폭발적인 질문들을 쏟아내지만 나의 혼술과 '아침에 주스'로 채워진 아이들의 잔을 부딪히며 뿌듯하고 따스한 색깔을 가진 새로운 이미지를 내게 새겨 넣는다.


그리고 취중진담.

부모님 덕분에 이 과정을 마치고, 시작하게 되었음에 감사하며 현재 다른 수업을 듣는다고 함께 하지 못한 신랑에게 글로 남겨 마음을 표현한다. 내게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늘 보통의 일처럼 여겨준 신랑과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특별하다고 여겨준 부모님 덕분에 나는 내 길을 상황에 주어진대로 걷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 균형이 깨어지지 않도록 나는 감사하며 살 것이다. 그리고 대학원에서 만난 선생님들과 원장님들 덕분에 '지금'의 순간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태어나기 전,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미리 설계하며 삶을 선택하는 베르베르의 어느 소설에서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마 상상의 그 순간들이 무한대분의 일의 가능성일지라도, '나'라는 자아가 이러한 삶을 선택했다면 현재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주변에 대한 감사로 가득한 이 밤, 두 아이는 태블릿을 보며 가상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나는 편의점에서 9900원에 구입한 와인을 혈액에 섞은 채로 브런치에 글을 남기고 있지만, 이런들 저런들 어떠랴?

글을 쓰며 간간히 웃는 내게 두 아이는 '왜?' 하며 웃음의 근원을 찾지만, 사실 모두가 삶에 대한 감사함임을 아이들이 알 수 있을까? 내 아이들이 나만큼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이 글에 뿌리면서 오늘 하루의 소감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께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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