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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otoly Dec 03. 2020

이스라엘 식으로 키운 한국인 프로그래머

이번 글은 <후츠파, 인발 아리엘리>를 읽으며 내가 이스라엘의 후츠파 정신과 상당히 유사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 버전으로 후츠파를 어떻게 겪어왔는지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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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미한 기억 조각들

2. 발라간

3. 실패

4. 진정한 예의

5. 쉬프주르

6. 내가 성공을 절대로 할 수 없는 이유

7. 마치며



희미한 기억 조각들

조금씩 기억나기 시작한다. 지금의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초등학교에서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다큐 영상을 통해 이스라엘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지식을 심화할 수 있도록 토론을 통해 의견을 나누고, 그로 인해 수업에 생기가 있었다.


학생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학생이었던 우리 대부분은 알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모습만 담으려는 다큐멘터리 영상일지라도 한국 학교 학생들을 촬영한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다큐만큼 수업시간의 활기는 절대로 영상에 담을 수 없다. 그들의 수업 분위기는 말 그대로 찐텐으로 보였다.


이러한 영상을 선생님들 덕분에 자주 접하게 되었고, 나는 지식을 친구들과 나누는 것과 선생님에게 질문하고 반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다른 기억도 생각이 난다.

나는 초등학교 1~2학년 즈음에 흥미로운 지식을 책자로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전파하던 게 기억이 난다. 용돈이 없는 초등학생에게는 귀하디 귀한 100원짜리 도화지와 유치원에서 배웠던 책자 만드는 방법을 응용해서 여러 과학 지식을 책자로 만들고 친구들에게 퀴즈도 냈다.


초등학생 때, 장사하던 기억도 생각난다.

가끔은 땅에서 500원을 주우면(와.. 이 날은 경사 나는 날이다.. 500원이라니!) 문방구에 들러 도화지와 코팅지를 샀다. 당시에 코딩 지는 A4 사이즈로 한 장에 200원 정도로 기억한다.

그리고 도화지에 나만의 그림체로 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그려서 코팅지에 코팅한 후, 100원에 팔았다.

참고로 그 그림은 거창한 그림이 아니라, 엄지손가락보다 작은 조그마한 귀여운 그림이었다. (그렇다... 지금 보니 어릴 적 나는 지능적 양아치였다...) 코팅지 한 장이면 그림을 십 수장은 코팅해서 팔 수 있었다.


이번에 <후츠파>를 읽으며 내가 어떤 방식으로 후츠파 정신을 가지고 성장했는지 기억을 되짚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식으로 후츠파 정신을 갖춘 나의 예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발라간

이것들은 모두 부재에서 시작되었다. 부모님은 내게 항상 부족하게 키워서 미안하다고 말하시던 게 기억난다. 나는 당시 부족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그런 말을 듣다 보니 나는 집이 부유하지 않아서 용돈을 받지 않는 게 당연한 게 되었다. 도덕성이나 효심이 작용한 것이 아니다. 그냥 그게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과 같은 수준의 당연함이 되었다. 나는 용돈을 받지 않는 게 당연한 존재였다.


친구들이 모두 문방구에 들러서 맛있는 불량식품을 사 먹을 때, 그 친구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돈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용돈의 개념을 알게 되어 놀라웠으며 되게 부유하게 사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지도 않지만 부유하지도 않다는 것은 알고 있기에, 용돈을 어떻게 받을지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걸 하기 위해 돈을 어떻게 모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어릴 적의 나는 지금 나와는 달리 되게 똘똘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림을 코팅해서 팔았다. 고학년이 되어가면서 나의 손재주도 조금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샤프심 통 석궁을 팔기도 했다.(어떤 것인지 궁금하면 검색해보길 바란다.) 샤프심 통 3개와 고무줄만 있으면, 이쑤시개를 발사하는 아주 멋있는 석궁을 만들 수 있다. 당시 샤프심 통 1개 가격은 300원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나에게 1000원을 주면 석궁 1개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다만,  빈 샤프심 통 3개를 가져오면 500원에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참고로 석궁을 만드는데, 샤프심은 필요 없다. 그래서 석궁을 만들면 쓰레기처럼(?) 나오는 샤프심은 친한 친구들에게 주거나, 이것도 돈 받고 팔았다. 그렇게 모은 자금은 모두 순간접착제를 사거나, 새로운 샤프심 통 석궁을 만드는데 모두 사용하였다. 또한 무료로 샤프심을 나눠주면 브랜딩과 마케팅도 했다.(사실 그냥 샤프심이 버리기는 아깝지만 쓸데는 없어서 한 행동이지만,..ㅎㅎ 지금 보니 브랜딩이자 마케팅이었다.)


내 기억에 초등학교 생활에서 가장 단가를 높게 판 물건은 3000원에 팔았다.(여기서 3000원의 가치에 대해 감이 잡히지 않는 분을 위해 설명하자면, 당시에는 샤프심 통이 300~400원 하였으며 피카츄 돈가쓰는 1500 원했던 거 같다. 우리 학생들의 기축통화는 샤프심 통과 피카추 돈가쓰 아닌가? 기축통화 중에 쫀디기도 있지만,,, 가격 변동이 너무 커서 생략! 그래서 이렇게 비교한다.ㅎ) 내가 만든 ak-47 소총의 나무젓가락 피규어를 3000원에 팔았다. 당시에 양아치처럼 너무 높은 가격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 친구랑 인연 끊길 생각까지 감수하고 팔았다ㅋㅋ 하지만 당시 그 친구는 밀리터리 덕후였고, 피규어를 그 친구 방안에 자랑스럽게 장식해두고 있어서 뻘쭘함과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했었다.


또 다른 기억도 있다. 당시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 커뮤니티 내에서 가상화폐를 만들고 원활히 사용하게 만들었다. 이건 다른 학교까지 퍼져나간 레전드였기에...

아마 3~4학년 때였을 것이다. 비 오는 날이다. 정말 생생하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친구와 함께 집으로 하교하는 길에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발견했다. 보라색 색종이로 만든 멋들어지게 생긴 미니카였다. 그냥 무심하게 지나치고 싶었다. 고작 사람들에게 밟히고 빗물에 젖은 종이 쪼가리를 호주머니에 넣고 집에 가져가서 관찰하는 것은 괜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애써 모른 척 지나갔다. 

이게 그 종이 쪼가리를 재현한 것이다.


하지만 학교 정문을 지나고 호기심을 참을 수 없던 나는 친구들에게는 먼저 가라고 인사하고 나는 다시 그 종이 쪼가리를 주으러 갔다. 다행히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그 종이 쪼가리를 들고 집에 가져가, 조심스럽게 해체하면서 내부구조를 파악하고 똑같이 접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게 시작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색종이를 빌렸다.(아니.. 정확히는 그냥 달라고 했다.) 어떤 친구들은 색종이를 책상 서랍에 백장 정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 자본가를 찾아가서 색종이 몇 장 줄 수 있냐고 물었고 그 친구는 무심하게 색종이 십 수장은 내게 주었다. 그리고 어제 알아낸 미니카 접는 방법으로 미니카를 여러 개 만들었다. 그냥 멋져서 계속 만들었다.


따분한 수업시간에 지우개 따먹기를 하는 친구들을 보았다. 그 친구들을 보면서 미니카로 알까기와 같은 게임을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쩌다 보니 친구들과 모여 미니카로 알까기를 하게 되었다. 고작 색종이로 친구들과 정말 재밌게 놀았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도 학교에 모여서 미니카 알까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흘러, 단순한 알까기는 시시하기 때문에 미니카 연구팀을 만들어서 다양한 형태의 미니카를 개발했다. 단순히 형태만 바뀌는 연구도 있었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기도 했다. 미니카 위에 미니카를 입혀서(?) 더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기도 했으며, 유치원 때부터 배운 색종이 접는 방법이랑 주변에 친구들이 색종이로 이쁘장하게 만든 물건이 있으면 어떻게 만든 건지 그 친구들이 알려주는 대로 공부해서 미니카 게임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며 완전히 다른 게임 방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한 도화지에 친구들의 미니카 게임의 계정을 장부를 통해 관리하면서 알까기 리그전 순위도 기록하고 게임 머니도 기록하여 다양한 미니카 장비를 게임머니로 팔기도 했다. 이 게임은 학원과 전학생들을 통해 다른 학교로 퍼져나갔으며, 내가 아는 퍼져나간 초등학교만 해도 3개 정도였다. 


당시에는 무덤덤했는데, 사업을 배우고 실행하다 보니, 초등학생 때의 내가 엄청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모든 건 용돈이 없었기에 가능했다. 용돈이 있는 친구들은 유희왕 카드를 샀다. 당시 유희왕 카드는 1팩 당 2000원? 3000원? 정도였다. 아무튼 얼마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엄두도 낼 수 없는 가격이었다. 유희왕 카드를 살 수 있는 친구들은 그 카드를 사고, 정해진 규칙에 맞게 놀았다. 하지만 나는 부족한 자원으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상상하는 대로 다 만들고 놀 수 있었다.


이게 바로 발라간이다. 발라간은 미리 정해진 질서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쓰레기장에서 아이들이 논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유희왕 카드게임이 아닌, 정해진 것이 없는 쓰레기 더미에서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물건을 만든다. 그렇게 그들은 정해진 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창조와 혁신을 만들어낸다.


이스라엘과 같이 주변에 쓰레기장이 없다고 우울해하지 말자. 방법은 얼마든지 많다. 나 같은 경우에는 '호기심'과 '용돈의 부재'가 있었기에 도시에서 발라간을 접할 수 있었다.


실패

처음 쓰디쓴 실패를 겪은 것은 과학고등학교 면접에서 탈락했을 때이다. 당시에 인생 다 산 듯이..ㅋㅋㅋ 방 안에 틀어 박혀서 평생 놀만큼 방탕하게 다 놀았다. 정말 혼자서 꾸준히 잘 놀았다.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연히 과학고에 합격할 줄 알았고, plan B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학고 탈락은 나의 모든 노력과 내가 가는 방향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고모께서 내게 어떤 말들을 해주었다. 무슨 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현실적인 이야기들이었던 거 같다. 말씀해주신 내용과는 별개로, 현실을 인지한 나는 분노에 차올랐다. 그리고 과학고 학생들을 쓸어버리겠다는(?) 분노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던가... 나는 하루에 4시간만 자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교 공부만 하지 않았다. 올림피아드도 준비하고, 프로그래밍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대학교 진학을 하는 시즌이 되었다. 나는 고교 2학년 말에 진지하게 자퇴를 고민했다. 인공지능이 날뛰고 있는 시대에 지금 하고 있는 공부의 의미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꿈에 그리던 카이스트에 합격하지 않으면 다른 대학교는 딱히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어째서인지 나는 간절히 원하는 것만 이뤄지지 않는다. 카이스트도 불합격했다. 오랜만에 완전한 허탈감을 느꼈다. 과학고 떨어지고 난 뒤, 3년 만에 느낀 감정이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내가 과학고에 진학하지 않고, 카이스트에 합격하지 않은 게 너무나도 감사하다. 과학고에 들어갔으면, 내가 일반고에 있었던 것만큼 자유롭게 다양한 공부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카이스트에 들어갔다면 꿈의 학교에서 학업에 열중했을 것이다.


과학고나 카이스트 입장에서도 나를 학교에 들이지 않은 게 다행일 것이다. 나를 떨어뜨린 입학사정관이 옳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 학교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학교의 인재상에 맞는 훌륭한 학생이 될 수는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세상 일은 자연스럽고 이치에 맞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당연한 원인에 대한 당연한 결과를 인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가고 싶은 학교에 모두 떨어지고,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스타트업이었다. 그렇게 스타트업을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일은 모두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실패에 대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엄청난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 없다. 나는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보았다. 계속해서 공부를 하면서 과거의 내가 잘못한 것들을 찾아나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잘못한 부분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꾸준하게 실패하면서 나는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결과가 나쁘더라도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패를 하고 반성하고 회고하고 개선하면서 실패는 나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방법이 잘못된 것이지 나의 목표와 인격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를 알게 된 순간 나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매번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단지 매번 가장 올바른 선택과 행동을 하고, 계속해서 배우면 되는 것이다.

방법이 잘못된 것이지, 내가 잘못된 게 아니다!


진정한 예의

나는 '사회가 바라는 예의 바른 학생'이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에서 굳이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으며, 수업시간에는 자지 않고 최대한 들으려고 했다.(꾸벅꾸벅 졸기도 했지만..) 왜냐하면, 부모님과 사회에서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깐....


시간이 흐르고 나는 스타트업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진정한 예의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수업을 똑바로 들을 것을 강요받아왔다. 하지만 왜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자렸는지에 대해 선생님들은 고민하시지 않는 듯하다. 물론 모든 선생님이 그러시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이 공부에 관심이 없듯이 대부분의 선생님들도 진정한 교육에 대해 관심이 없으셨다. 적어도 지루한 수업시간을 바꾸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스타트업에서는 서로 솔직하고 즉각적으로 피드백을 하고 공통의 목표를 향해 최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진정한 예의로 취급받는다. 서로 기분 상할까 봐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미움받기 싫어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일을 엉망으로 만드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내가 초중고교에서 받은 교육은 정말 예의 없는 수업시간이었다. 학생이 교사에게 예의가 없는 수업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에게 예의 없는 수업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고교생활을 후회한다. 인터넷 강의보다는 저퀄리티의 수업을 하며,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 강의에서 얻지 못할 무언가를 주지도 않는다.


고등학교로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취침하거나 자습을 하고, 학교 밖에서는 인터넷 강의를 기반으로 적극적으로 공부했을 것이다. 또는, 선생님들이 학생에게 진정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교육 시스템에 대항했을 것이다.


사실 요즘 그러려고 노력 중이다. 고등학교에 찾아가서 내가 공동 설립한 IT 동아리에서 IT 교육도 하고, 현재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서 강당에 서서 이야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그 방법은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수차례 선생님께 말씀드렸지만 코로나로 인해 거절당했다.(어쩌면 교육체제에 저항하려는 나의 음모를 알고 거절당한 걸 수도...?! 선생님들께서는 내가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계실 듯하다ㅋㅋ) 

후츠파를 읽으니 다시 한번 어떻게든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학교에 특화되지 않는 인재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게 바로 진정한 선생님과 학생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쉬프주르

쉬프주르란 내 입맛대로 물건을 고쳐 쓰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에서는 군무기도 개인의 취향에 맞게 개조한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자율성과 호율성을 향상해 좋은 결과를 이끌어낸다.


나도 내 입맛에 맞게 이것저것 바꾸는 걸 좋아한다.


후츠파를 보고 난 뒤, 후드티도 내 입맛대로 만들어서 입고 다닌다ㅎ

첫 주문제작이다 보니 엉성하지만, 내 닉네임인 'NANOTOLY'를 후드티에 대문짝만 하게 넣어뒀다. 그리고 닉네임 아래에는 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몇 가지 키워드를 넣어서, 내가 누구인지 알리며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리마인드 하는 용도로 쓰고 있다.

참고로 nanotoly는 nano부터 light year단위까지 모두 탐구하고 고민하자는 나의 목표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from nano to light year -> nano to LY -> nanotoly)


그리고 알람 시계도 직접 만들어 쓴다. 내가 워낙 잠을 좋아하다 보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일어날 수 없었다.

알람 앱도 만들어 쓰고(알람 앱으로 비즈니스도 시도해보려 했는데 실패했다ㅎ) 기상시간에 맞춰 불 켜주는 로봇도 만들어서 아침에 나를 잠에서 깨도록해준다.

https://youtu.be/H-bcRsqCcVM

https://youtu.be/HpCZwJsuAAY


그리고 검색창도 내 맘대로 바꿔 쓴다.

https://youtu.be/-biCqNtiNVM




내가 성공을 절대로 할 수 없는 이유

사실 이 책에서 내가 건진 너무나도 당연하고 흔한 이야기이자만 너무나도 필요하고 강력한 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히예 베세데'이다.


나는 첫 사회생활 3년을 스타트업 생활을 해왔다. 매출도 없고 아이템도 확실하지 않은 스타트업에서 일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처음부터 하는 걸 좋아해서 매출도, 아이템도 없는 스타트업에 들어갔다.(그만큼 사업을 만만하게 봤으며, 합리적인 사고력도 부족했다.)


이렇게 모자란 나는 수차례 계속 실패했다. 처음에는 뭐든 만들고 뭐든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수차례의 실패를 계속했고, 아무리 공부를 해도 매출은 발생되질 않았다. 매출이 발생되기는커녕 소비자를 만나보지도 못했다. 그런 시련의 기간 동안 나는 꿈이 아주 작아지게 되었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없다고 느껴졌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큰 꿈보다는 당장의 매출이나 브랜딩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이 사업이 커서 나중에 어떻게 될지에 대한 큰 꿈을 꾸지 않고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쓰러지지 않고 다치지 않을지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학교 선배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선배도 사업에 관심이 많으며, 이전에도 많은 활동을 통해 매출을 발생시켰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떤 활동을 어떻게 해왔는지 여쭤봤다. 그 선배의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 선배는 "꿈은 크게, 실행은 작게"의 표본이었다. 항상 큰 꿈과 미래를 생각하고 실천 가능한 작은 실행을 빠르게 해오셨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셨다.

원래 낙관은 귀한 거야


마침 나는 선배와 이 이야기를 할 당시 후츠파를 읽고 있었고, 책의 마지막에서 낙관을 잃지 말고 큰 꿈을 가지고 실행해야만 큰 성공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읽을 당시에는 너무 당연한 말이라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내가 당연하게 지나친 구절을 실행하고 계시는 선배를 보니 아차 싶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결국 모든 일은 잘될 것이야!'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있는 듯하다. 이러한 신념을 '이히예 베세데(yiheye beseder)'이라고 한다. 그 덕에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해내 왔다.


나는 3년간 꾸준한 실패와 이를 잘 관리하지 못한 탓에 '결국 어떤 일이든 내가 하면 잘 안될 거야'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후츠파와 학교 선배 덕분에 나는 내 머릿속에서 '이히예 베세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아직 '이히예 베세데'와 같은 긍정적 사고가 내 머릿속에 자리를 잡기는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하다. 하지만 이 같은 낙관이 내 머릿속에서 없어진 걸 인지한 것만으로도 많은 발전이 이뤄졌다. 앞으로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근거 있는 낙관을 내 머릿속에 자리 잡게 할 것이다.



마치며

이 책을 통해 내가 가는 방향이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후츠파 정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하니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항상 특이한 방향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불안했다. 이제는 그 불안함이 너무 무뎌지긴 했지만, 이스라엘에서도 나와 비슷한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니 든든했다!


뿐만 아니라 이히예 베세데와 같은 낙관이 내게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지금 당장의 생존도 생각하는 동시에 멋지고 낙관적인 미래도 생각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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