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20km의 삶

눈 여겨 보고 싶은 것, 흘려 보내고 싶은 것

by 난편

2025년 09월 22일 21시 00분


여덟 살 때였다. 이웃들과 같이 쓰던 마당 어딘가에 파란색 자전거가 있었다. 내 첫 자전거였다. 어릴 적부터 물건에 이름을 붙이기 좋아했던 나는 자전거에 ‘블루-맨’이라는 멋진 이름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한 남자’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이었다. 그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며 자랐다. 그 자전거를 타고 있으면, 한두 살 많은 형들과 거뜬히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보다 2살쯤 어린 사내아이와 자전거를 타다가 다툼이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코를 한 대맞고 그만 엉엉 울며 집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난다. 집 근처 어딜 가든 함께하던 내 자전거는 어느새 보조바퀴를 때고, 어엿한 두발자전거가 되었다. 그리고 열 살 즈음 이사를 가면서 아마 그때 헤어진 것 같다.


스물여덟이 되었다. 대학에서 건축전공으로 졸업하고, 군복무도 거뜬히 마친 후 맞이한 코로나 창궐의 시대. 그 어렵다는 취업을 서울로 성공한 경상도 촌놈은 워라밸이 무너진 첫 회사에 정신이 아득히 갈려져갔다. 거의 매일 되는 야근과 잦은 철야와 주말출근까지. 가끔씩 출근하지 않는 주말엔 힐링이랍시고 누워서 배달음식을 시켜먹으며, 휴대폰을 쳐다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하면 스트레스가 풀릴 줄 알았다. 당연히 풀리지 않았다. 주변에 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친구들과도 가깝게 지내지 않던 외톨이는 혼자 그렇게 단칸방과 회사를 오가며 어느샌가 삶의 이유를 잃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발전이 없던 스스로에게 환멸이 나던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무슨 정신이었을까. 점심시간에 회사근처에서 빌린 따릉이로, 주변을 달렸다. 근데 그게 그렇게 신이 났다. 정말 오랜만에 바람을 느꼈다. 그 선선한 가을바람에 20년 만에 느껴보는 속도감이 막혀있던 세상을 뚫었다. 아이러니 하다. 20년 전의 ‘블루-맨’, ‘우울한 남자’는 결국 20년 후의 나에 대한 스포일러였을까. 구두 뒷굽이 다 닳도록, 슬렉스가 터지도록 자전거 페달을 굴리던 나는 오랜만에 웃고 있었다. 이 재밌는 걸 왜 20년 만에 다시 시작했을까. 일을 하며, 주말이 오기를 기다렸다. 출근하지 않는 주말, 마곡에서 출발한 나는 아라뱃길을 따라 인천으로, 또 다른 날은 한강을 따라 하남시까지 갔다 오곤 했다. 따릉이는 2시간마다 반납장소에 돌려놓아야 했다. 2시간마다 반납하며, 하루 열시간을 거뜬히 달렸다. 회사 사장님은 말했다. 무슨 자전거도 그렇게 오버해서 타요? 비아냥대는 회사 상사도, 개나 줘버린 워라밸도 이제 다 나랑 상관없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30층은 거뜬히 되는 회사건물 옥상에 올라, 청명한 하늘과 구름들의 사진을 찍으며 기도했다. 주말에도 오늘처럼만 화창해라. 오늘 하루 이렇게 힘들어도 괜찮아. 주말엔 신나게 달리면 되니까.


그렇게 열심히 자전거를 타던 나는, 개 같이 일해서 번 돈으로 자전거를 마련했다. 내 두 번째 자전거였다. 조금 타다가 친한 회사 동료에게 팔았다. 중고 로드자전거를 세 번째 자전거로 하나 구했다. 회사를 3번 옮기고 이사를 3번 하는 동안 이 세 번째 로드 자전거와 함께 평일은 출퇴근을, 주말은 나들이를 하며 그렇게 살았다. 자전거와 함께 넘어져서 다치기도 하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들을 자전거와 함께 가보기도 했다. 봄에는 벚꽃 길을 달리고, 여름엔 우거진 숲길을 달리고, 가을엔 단풍잎을 밟으며 달렸고, 겨울엔 장갑을 끼고 찬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나 나름대로 소소하게 하지만 착실히 삶을 채웠다. 그렇게 서울의 삶을 6년차쯤 살아가고 있다. 어느새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친구들은 차와 집과 가족을 꾸려가며 탄탄히 살아가고 있다. 속도는 상대적이라고 하던가, 친구들의 속도는 분명 나보다는 훨씬 빠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시속 20km의 자전거로 보는 세상이 즐겁고 흥미롭기만 하다. 걸으면 너무 자세하게 보이는 것들을 흘려보내고, 차를 타면 스쳐지나가서 볼 수 없는 것들을 적당히 관찰할 수 있는 시속 20km. 집과 회사의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이 속도감은 언제나 나에게 일상으로의 새로운 시각과 편안함을 가지게 해준다. 이 편안한 속도감 속에서 아직은 좀 더 어리광 부려도 되지 않을까.


특히 요즘 더 혼란스러워졌다. 생각만 계속 많아지고, 나눌 사람들은 점점 더 없어진다. 내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겨우 가지고 있던 여유마저 놓치게 될 것 같을 때 즈음. 선선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마침 또 가을이 오나보다. 올해도 어김없이 나는 자전거를 꺼내고, 편안히 페달을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