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한 매력:내성적인 사람이 성공하는 자기 관리법>에서 찾은 삶의 요령
# 유치원에 아이를 처음 입학시키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엄마를 알게 됐다. 우리 아이와 같은 반이 된 아이의 엄마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엄마는 내게 메시지로 같이 차 한 잔 하자고 말을 걸어왔다. 친하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은 사람과 차를 마신다는 건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같은 반 친구의 엄마'라는 이유로 기꺼이 약속에 응했다. 약속한 날이 되어 카페를 찾은 나는 크게 당황했다. 자리에는 그 유치원을 보내고 있던 다른 선배 엄마들이 모두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까지 해서 한 8명 정도 됐다.
그들은 이미 친분이 깊었다. 심지어 나에게 만남을 제안한 그 엄마도 선배 엄마들과 '언니, 언니' 하는 사이였다. 8명 정도 되는 낯선 엄마들 틈에서 쩔쩔매며 어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러면서도 웃긴 건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고 애썼다는 점이다. 마치 이 자리가 너무 좋고 반갑다는 듯이 행동했다. 오전 티타임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제안에도 슬쩍 빠지지 못하고 순순히 응했다. 순대국밥을 먹으러 갔는데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시간까지 견디고 나서야 나는 집에 와서 쓰러졌다.
이 일은 나의 육아 인생에 있어서 꽤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좀 더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나머지 7인의 엄마들로부터 '어디 새로 들어온 신입생 엄마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보자'는 듯 나를 꿰뚫는 시선마저 느꼈다고 고백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오히려 이 일을 잘 된 일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다른 엄마들을 더 폭넓게 알아두고, 유치원에 대한 정보도 얻고 서로 친목을 다질 기회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마 그 엄마도 단순히 그럴 기회를 얻기 위한 거였다고 짐작해본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어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집에 와서도 '어쩌면 좋을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왜 나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을까?' 하며 내심 자책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임에 있던 엄마들을 대하기 더 불편해졌다. 물론 겉으로는 웃으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속으로는 덜덜 떨며 철벽을 쳤던 것이다.
이 일은 좀처럼 잊히지 않고 여전히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이를 위해서 '그것도' 못하는 엄마라서 미안했다. 때로는 검색창에 '유치원 엄마들과 꼭 어울려야 하나요'를 검색하며 스스로 위안하려고 애도 썼다. 그러나 '아이를 위해서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요' 같은 답변을 보면 다시 쭈그러들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며 세력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내 모자란 사회성 탓 같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초등 아이 엄마가 됐다. 그리고 한 책을 통해 그 사건에 대한 대처가 나의 모자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오히려 나는 나의 성향을 서른이 넘어서까지도 모르고(아니 인정하지 않고) 살고 있었고, 외향적인 사람을 서툴게 흉내 내며 살고 있던 것이다.
로리 헬고가 쓴 <은근한 매력:내성적인 사람이 성공하는 자기 관리법>이라는 책은 내성적인 사람(=내향인)이 현대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을 위로하고 그에 따른 대처법을 알려주고 있다. 스스로를 내향인으로 소개한 작가가 이 책을 봤다며 소개했을 때, 본능적으로 나도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내가 정말 내향적인 사람이 맞는지. 내성적인 사람도 아니라면 정말 나의 어떤 면에 부족함이 있는 건 아닌지 알고 싶었다.
로리 헬고는 내향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의 내적 원칙에 충실하며, 거기에서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삶의 태도를 이끌어내는 사람'
그러나 바로 이런 설명을 덧붙인다.
'그러나 많은 내향인들은 주위 시선에 흔들렸다. 내성적인 사람의 힘을 되찾으려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뜯어보아야 한다'.
1. 내향인도 사교적이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방식이 다를 뿐
내향인은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춘다. 외향인은 사람들과 대면하며 어울리는 행위 자체로 상호작용한다. 거기에 굳이 '깊은 의미'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어쩌면 귀찮아할지도)
하지만 내향인은 사람들의 생각을 가슴에 '새긴다'. 그래서 대답할 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만남에 의미 있는 가치나 생각이 공유되길 바란다. 얼마나 자주 만나는지보다 생각의 공유로 친분을 쌓는다. 단순히 사람들 안부나 그들의 행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소음처럼 받아들인다.
2. 내향인은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자기 안으로 끌고 들어가 '내면화'한다.
외향인은 문제를 주변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해결하는 등 짐을 나눈다. 그러나 내향인은 문제를 자신 안으로 끌어들여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해결하고 싶어 한다. 종종 혼자 짐을 떠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정신건강 서비스를 더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3. 인생을 뒤집어 보려고 하고 내면의 성찰을 하는 것이 바로 내향인들의 에너지의 원천이다.
이들은 외부 활동보다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등 사색에 더 심취한다. 말을 경청하기도 잘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도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주기를 기대한다. 대화보다 글로 하는 소통이 더 편할 때가 많다.
4. 외향인보다 자극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쉽게 고갈되며, 주변 자극을 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2003년판 MBTI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전기활동에 대해 혈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본 결과, 뇌가 자극받았을 때 외향인 뇌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그들의 에너지도 더 빨리 고갈된다. 같은 자극에도 더 크게 반응하기 때문에 에너지도 더 많이 쓴다는 것이다.
내향인은 뇌가 선천적으로 너무 부지런해서 아이디어를 준비하려면 외부 자극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 즉, 내향인은 즉석에서보다 미리 생각해두었을 때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는다.
5.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내향인들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을 방해하는 소음과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미국의 소비 지상주의로 인해 현대의 대중 문화는 더 많은 물건을 갖고,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더 많이 자신을 드러내야 좋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인기 많은 사람일수록 혼자 있는 법이 없다'는 것은 반대로 혼자 있는 시간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어서, 성공한 인생이 아니어서라는 등의 이유로 폄하되기 쉽다. 내향인이 본성대로 살기 어려운 이유다.
6. 사회적 가면을 가지고 있다.
내향인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자신이 내향인임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내향인(예를들어 괴짜, 덕후 등)이 있는가 하면 적절히 외향인의 모습을 갖춘 사회적 가면을 쓰고 내향성을 숨기는 내향인이 있다.
이들은 어릴 때는 방에 틀어박혀 공상과학 책을 쓰거나 그림에 몰두하거나 사진을 찍을 때도 아랫입술을 물어뜯고 있거나 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카메라를 보고 자신 있게 미소 지으며, 대화할 때도 친근하게 눈을 맞춘다. 친절하고 상냥하며 싹싹한 전문가(주로 그들이 골몰하는 분야)로 보일 때가 많다. 이들은 세상에 드러내는 얼굴과 평소에 혼자 생각에 잠겨있을 때 모습이 다를 수 있다.
7. 자신만 아는 마음의 안식처가 있다.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헤매거나 이미 갖고 있다. 그곳은 심지어 사이버 공간일 수도 있다. 녹지, 어두운 카페, 소파, 광활한 전경이 펼쳐진 곳, 예배당 등 다양한 곳이 안식처가 될 수 있다.
2001년 MBTI 연구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인구통계를 표본으로 한 인구의 절반 이상(약 51%)이 내향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로리 헬고(저자)는 그러니 사회적 통념(외향인처럼 굴 것)대로 행동하지 말고 내향인 답게 행동하라고 조언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인구의 절반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그동안 견디고, 참고, 숨기려고 애쓰던 것들이 사실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게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편해졌는지 모른다.
친구들이 단순한 안부를 나누거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디를 놀러 갔다 왔는지 이야기할 때 왜 나는 더 궁금하지 않고 따분해지는지. 신나게 이야기하는 친구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러면서도 짐짓 흥미로운 척 대답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오히려 나는 서로 고민을 나누거나,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어떻게 되고 싶은지, 또는 그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는지, 최근에 본 책이나 영화 등 생각이 드러나는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좋았다.
친구가 만날 약속을 잡았다가 취소한다고 미안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에도 그랬다. 집에서 혼자 조용히 영화나 봐야지 하고 속으로 좋아 날뛰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아쉬운 척 애쓰기도 했다. 친구가 싫지도 귀찮지도 않았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이 더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회사에서 일할 때에도, '저는 낯을 가려요'라고 말하면 동료들은 믿지 않았다. 이미 나는 훌륭한 사회적인 가면을 장착한 상태였던 것이다.
나는 내향인으로 태어났고 자랐으며,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많은 외향성이 주도하는 세상의 흐름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사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모르고 자랐을 뿐이었다.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내향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깨달았다면 내향인으로서 좀 더 행복하게, 나답게 사는 방법도 있다.
다음을 참고해보자.
1. 자기만의 공간을 소중히 여기자. 없다면 만들어 보자.
안식처는 어디든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2.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내자'
시간이 필요한 일에는 시간을 '갖지'말고 '내자'.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일 말고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시간을 내야 한다. 또, 사람들의 시계추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보자. 날랜 사람들 흐름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구석에서 책 읽는 내성적인 사람과 당신 뒤에 깔린 잔디로 시선을 돌려보라. 특히 누군가가 즉각 뭔가 요구하면 '안돼요'라고 대답해 보자.
3. 순환하는 시간에 몸을 맡기자
A-Z까지 순서대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려고 애쓰지 말자. 막히는 구간이 생기면 물러나서 조용히 생각해보자.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걸 포기했을 때 나중에 갑자기 찾게 되는 것을 떠올려보면 공감이 될지 모르겠다.
4. 중간 단계를 받아들이자
그동안 기대에 순응하고 그에 부응하느라 목표 지향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목표와 목표 사이의 시간을 탐닉하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 멍하니 앉아있는 것 모두 괜찮다. 시간과 경주하지 말자.
5. 수시로 은둔하자
자극이 지나치게 많을 때, 삶의 우선순위가 뒤섞일 때,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잘 모르겠을 때가 은둔해야 할 타이밍이다.
은둔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침묵을 할 수도 있고, 시, 쇼핑, 영성, 예술활동, 요가, 자연, 사진, 명상, 독서 등등 단어 뒤에 은둔을 붙이면 수많은 형태의 은둔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좋아하는 일에 대한 몰입이 은둔일지 모른다.
일상의 짧은 은둔도 있다. 한 시간 정도 일상에서 벗어난 일을 해보는 것이다. 영화를 보거나 산책을 하는 것은 자신과 데이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6. 익명의 누군가가 되어 관찰자가 되어보자
익명성을 갖고 있으면 어떤 상황의 중심에 있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게 된다.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보는 도시를 거닐거나, 집에서 좀 떨어진 카페에 앉아 주변을 관찰하면서 그림을 쓰고 그리기 등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내향인은 익명성이 보장될 때 가면을 벗고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7. 내향인이 인간관계 맺는 방법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자
내성적인 사람이 잡담을 싫어하는 이유는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다.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만드는 장벽이 싫어서다.
상호작용에 필요한 에너지가 제한된 내향인들은 만날 사람도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사람이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근접성 위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비슷하게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내적으로 통하는 '특별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라는 각오도 해야 한다. 마음이 잘 맞고 함께 있으면 편안한 사람을 만나기까지 단번에 이루어지기는 힘들 테니까.
어쩌면 저 위의 7가지 방법들은 내향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내 공간에 혼자 쉬지 못할 때, 떠밀리듯이 기대에 부응하며 사느라 재촉당할 때, 모든 사람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려고 애쓸 때 나는 참고, 견디고, 괜찮은 척하려고 애썼다.
저 7가지가 내향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저렇게 당연한 일이라면 친구와 가족들에게도 당당히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전까지는 왠지 그러면 안 되는 잘못된 일처럼 여겨졌다.
어느 날, 큰 애를 집에서 좀 먼 학원에 보내 놓고 기다려야 했던 일이 있었다. 학원 근처 스타벅스에서 1시간 반 정도를 앉아있던 그 시간은 생각 외로 내게 큰 휴식을 선물해주었다. 밖에서 오래 기다리다 와서 집에 오면 녹초가 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그날 저녁에 힘이 불끈불끈 났다. 그리곤 깨달았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나는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조용히, 아무것도 할 일 없이 앉아 있어 본 적이 별로 없었구나. 늘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게 아니면 아이들과 함께 이거나였다. 아무도 없이 아무 목적 없이 1시간 반을 앉아있던 그 시간에 나는 금방 매료되어서 그 후부터는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는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내 진흙이 가라앉아서 물이 깨끗해질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릴 수 있겠는가?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덕경>
그동안 내향인은 외향적인 세상이 대세임을 암묵적으로 배워왔고 그에 맞추어 살아갈 것을 강요받았을지도 모른다. 아마 세상살이에 대한 요령이 있다면 그 바탕에는 외향인들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내향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요령을 살펴보자.
1. 의사소통할 때
내향인은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곧바로 대답하기보다는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대화에 공백이 생겼을 때 마치 할 말이 없어서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향인이 대답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로 채우기 일쑤다. 외향인은 특히, 대화 중 침묵이 생기면 자신이 계속 이야기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이때 내향인이 그들의 쏟아지는 이야기에 고개마저 끄덕인다면 대책이 없다. 내향인의 '끄덕임'은 그저 '너의 이야기를 내가 경청하고 있다'는 정도의 예의 표시다. 그러나 말하는 이는 이를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동의'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내향인에게 투영한다. 내향인은 네/아니오를 대답할 새도 없이 경청하면서 말할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끄덕임의 행위로 인해 '예스, 예스, 예스'라고 오해받기 쉽다.
이럴 땐 대화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필요하다. 쓸데없이 '맞아'라고 하지 말고 끄덕이지도 말자. 특히, '내가 뭐라는 건지 너도 알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맞장구치지 말자. 응/아니라고 대답할 필요도 없다. 그 질문은 마치 추임새처럼 으레 하는 말인 경우도 많다.
대신, 시선이나 말을 잠시 회피하며 자신이 아직 생각 중이라는 걸 표시하는 것도 좋다. 또 여유를 갖기 위해 '어려운 질문 같은데요. 생각 좀 해볼게요' 정도로 시간을 버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만약 '의사'처럼 정해진 시간 안에 대화를 마쳐야 하는 상대와 대화를 해야 하는 경우는 미리 대화 주제를 메모하고 준비했다가 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너무 수다쟁이 친구를 만났을 때는 내향인의 에너지가 상당히 많이 소모되므로 적당히 이야기를 자르고 벗어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머, 이제 가봐야겠다. 다음에 봐!"
2. 내게 필요한 일과 근무 환경에 대해
현대 사회는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보다는 그 사람이 하는 일에 더 초점을 맞춘다. 일에는 '자연스러운 일'과 '강요된 일'이 있는데 내향인들은 자연스러운 일에 시간을 더 낼 필요가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란, 일 자체가 나를 정의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무시하는 소소한 일을 나는 신경 쓴다든지, 어릴 때 빠져들었던 일이라든지, 남들은 귀찮다고 싫어하는 청소 같은 힘든 일이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반대로 강요된 일은 힘들지만 해야 한다고 스스로 밀어붙이는 일이다. 본성이 무시되며 에너지가 소비되는 일이다. 역할에 대한 압박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직장에서는 고용주에게 독립적으로 방해받지 않고 일할 때 훨씬 일에 집중할 수 있으며 일을 잘하고 효율이 좋다는 장점을 어필해볼 수도 있다. 고용주는 자기 성찰이 반영된 이런 태도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보고 좋게 평가할 수도 있다.
내향인은 불평하기를 두려워하는데, 오히려 불평하지 않으면 아무런 스트레스가 없는 줄 알고 일을 더 떠넘기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아직 어렵겠지만) 가끔은 정당하게 불평을 하는 것도 괜찮다.
내향인은 특히 사람들이 몰려다니며 웅성거리고, 소문을 만들어내는 것에 쉽게 지치기 때문에 직장이 중학교가 되어 자신이 중학생처럼 느껴진다면 제대로 된 성인이 다니는 직장으로 빨리 이직하는 것도 좋다.
또한, 일을 매우 잘 해내고 있는데도 연봉 인상 대신 칭찬만 받고 있다면 말보다 가치를 중요하는 회사로 이직하자.(물론 어렵겠지만) 자신을 나쁘게 평가하게 되는 직장은 떠나자.
3. 진정한 내 편 만들기
내향인은 문제를 내면화하기 쉽기 때문에 쉽게 자책하고 우울해지기 쉽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결국은 나 자신과 가장 편하고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내 편이 되어주려면 다음 두 가지를 점검해보자.
-나의 대화 방식에 주목하자 : 판단과 비판을 주로 하지는 않는지 살펴보고 스스로 상처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자. 비판하는 말이 있다면 긍정어나 중립어로 바꿔보자. '난 너무 민감해' - '난 민감해'. 스스로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가끔은 문제를 다른 사람이 해결할 수 있도록 모른 척하는 것도 필요하다.
-가끔은 고독과 이별하자 : 내성적인 사람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은 바로 '정보 결핍'이다. 만약 고독이 어느 순간 답답하다고 느껴진다면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날 때가 된 것이다. 일이 너무 바쁘다면 컴퓨터(일)에서 물러나 보자. 단 5분이라도 내게 떨어진 요구사항을 잊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럴 땐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이 좋다. 다 귀찮다면 하루 푹 자고 생각하자. 생각이 막히면 그냥 거기서 끝내보자.
4. 모임에서의 대처법
내향인은 거절을 어려워한다. 특히 참석하기 어려운 모임에 초대받았을 때 적절하게 거절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귀찮은 초대를 받을 수도 있다.
'나 그날 저녁에 약속(일, 아이 돌보기)이 있어. 같이 못 가서 아쉽네. 다음엔 꼭 갈게'와 같이 거절하면 다음에 또 귀찮은 초대를 거절하고 또 거절해야 한다.
차라리 '그거 내성적인 나 같은 사람한텐 지옥인 거 알지? 특히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큰 모임은 더더욱'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만약 모임 규모가 크고, 아는 사람이 적고,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낼 장소도 없는 곳이라면 내향인들은 미리 각오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런 조건에서 내향인들의 에너지는 빨리 고갈된다.
만약 일과 관련된 모임이라면 웬만하면 가는 것이 좋다. '모임=일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가면 된다. '좀 피곤하지만 가서 허드렛일이나 좀 도와주고 오지 뭐' 정도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외의 꼭 중요한 모임이라면 모임 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좋다. 만약 시댁 행사라면 남편에게 그다음 날 저녁이라도 아이들과 집안일에서 벗어나서 잠시 혼자 쉴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또한 모임에서 떠나는 시간을 미리 정해놓는 것도 좋다. 언제 모임이 끝날지 알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모임에서 이동하는 방법은 친척이나 시부모님의 차를 타고 이동하지 말고 각자의 차로 움직이거나, 차가 없다면 택시라도 타고 따로 움직이는 것도 방법이다.
좀 더 세심하게는, '잠깐 둘이만 나가서 쉬자', '지루해', '이제 가자' 등과 같은 둘만 아는 비밀 신호를 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가서 따로 산책을 하고 들어오는 것도 좋고, 모임 장소에 애완동물이나 아이가 있다면 군중 속에서 조금 떨어서 귀여운 동물이나 아이와 놀아주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그것도 아니라면 혼자 조용히 구석에서 시간을 보내는 비슷한 내향인을 찾아 그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하지만 내향인이라고 해서 모든 모임에서 이렇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로리 헬고(저자)는 친구를 위해 대규모의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모임에 참석해서 밤새도록 그 모임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모임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친구에게 큰 위안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웃기게도, 저 위의 4가지는 내가 살면서 문제에 봉착했던 모든 일들과 맞닿아 있다. 친구의 말을 끊기 조심스러워서 듣고만 있다가 모임에서 헤어지거나 전화를 끊은 적도 많았고, 일에 있어서도 강요된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애쓰기만 했지, 자연스러운 일을 위해 시간을 내지는 않았다. 직장에서 누군가의 소문이 도는 것이 느껴지면 소문의 주인공에 감정 이입하여 내가 고통스러워졌다. 그런 일에 휘말리면 일에 제대로 집중하기 어려울 때도 많았다. 그렇게 좌절되고, 포기한 일들이 내게 얼마나 많은지.
단편적으로, 그동안 내가 시댁 모임(대가족)을 왜 그렇게 힘들어했나(절대 싫은 게 아니었다) 싶은 것도 어쩌면 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편과 시부모님 빼고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댁 모임. 명절날, 큰 형님 댁에 자그마치 스무 명이 넘게 모였다. 산책할 곳도 없어서 나는 중간중간 베란다를 들락날락 하며 애꿎은 화분을 살폈다. 가만히 있어도 힘들고 피곤해지는 걸 이해해줄 사람도 없고. 시댁 가는 게 싫어서 저런다고 오해나 안 받으면 다행이었다.(사실 많이 오해받았다.)
로리 헬고의 조언을 이제야 봤지만, 나는 전부터 그러지 않아도 나를 살리는 방법을 점점 찾아갔다. 눈짓으로 남편에게 잠깐 둘이만 나갔다가 오자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고, 시부모님 차를 타고 함께 이동하며 명절날 큰집에 찾아가는 것도 그만뒀다. 우리끼리 따로 움직이니 모임에서 떠날 시간을 결정하는 게 훨씬 자유로워졌다. 특히, 명절 전날 몇 시에 큰집에서 떠날지 정해놓고 출발하는 게 도움이 많이 됐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그 시간들 속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나는 나름대로 내가 편할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찾은 것 같다. 세상이 좀 더 외향적으로 맞춰 굴러가다 보니 내향인에게 상대적으로 불편한 곳이 되어버린 게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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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적인 사람들은 내면의 저장공간이 더 넓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고민할 수 있다. 내성적인 사람들은...(중략)... 곰곰이 생각하며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아이디어, 창작물, 해결책, 진실을 내놓게 된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신비로운 힘으로 외향적인 사람들을 당황케한다. 내성적인 사람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당신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니 기운이 나지 않는가?
로리 헬고는 말한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자신에게 편안한 곳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성장하기보다 세월이 흘러서 때가 되면 찾아오는 것들에 의지한다.'
내향인들의 성장 모형은 다섯가지로 축약해볼 수 있다.
1. 내향성에 푹 빠져 지내기 : 때가 되면 외향성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평생을 외향적인 사람도 내향적인 사람도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만나는 사람에 따라 상대적으로 내가 외향적이 될 수도 있고 내향적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의 성향을 부정할 필요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지내면 된다.
2. 할 수 있다면 외향적으로 행동하기 : 외향성 역시 확장되다가 내향성으로 수렴할 수 있다. 저자는 친구를 위해 파티에 밤새도록 버텼던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 곳에서 2명의 진정한 친구를 만났고 그들과는 여전히 내향적인 자기 방식대로 깊은 생각을 공유하며 이어져오고 있다고.
3. '해야 한다'를 무시하고 '하고 싶다'를 따라가라 : 해야 한다는 말의 다른 뜻은 타인의 기준이 개입됐다는 신호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고 싶다는 것은 자기 내면의 것이고 변화의 씨앗이다.
4. 스스로 정체되어 있는지 파악하기 : 혹시 지금 따분하거나 어딘가에 중독되어 있다거나, 무기력한 상태라면 정체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라면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5. 변화가 두려울 때 기회가 생긴다 : 성공적인 변화에는 내면에서 처음 세 단계가 진행된다고 한다. 미리 숙고- 숙고 - 진행. 무엇인가 하고 싶다면 내면에서 그에 대한 소망을 충분히 쌓아올리는 것이 좋다. 다짜고짜 뛰어들지 말고 우선 기다려보자.
내성적이라고 해서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숨겨진 외향성이 드러날테니.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자신있게 밀고 가보자. 생각보다 더디더라도 자책할 필요 없다. 우린 생각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이다. 혹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면, 나가서 산책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보자. 예상 밖의 활기가 될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이렇게 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