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1 : 수학 연산보다 중요한 것
주말에 북어채랑 김치 좀 넣고 떡국 간단히 끓이려는데
거품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할 때 둘째가 다가왔다
"엄마 거품이 왜 이렇게 많아?"
"응~북어채 넣고 물 끓이면 이렇게 거품이 많이 올라와. 그래서 이렇게 국자로 걷어주면 좋아"
"어! 나도 해볼래"
식탁 의자를 딛고 올라선 둘째가
제법 무거운 국자를 들고 거품을 열심히 걷어내기 시작했다.
"국자를 너무 깊이 집어넣으면 국물까지 버리게 되니까
최대한 거품만 걷어내는 게 좋아. 이렇게"
둘째는 본대로 잘 따라하는 아이였다.
거품이 뜻대로 잘 떠지지 않아서 혹시나 속상할까봐
아이에게 쿠션어도 좀 써줬다.
"그렇다고 이게 몸에 해로운거라서 뜨는 건 아니야.
원래는 단백질 덩어리가 뭉쳐지면서 거품이 생기는거라서
완벽하게 다 걷어내지 않아도 괜찮아"
"엄마. 난 그냥 거품이 있으면 지저분해보여서 다 뜨고싶어"
오...전생에 주부였나.
그래도 다른 한 손으로는
의자 위에 서서 무서워서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작고 부드러운 촉감이
이 아이가 아직 초딩이라는 걸 잊지 않게 해준다.
거품이 꽤 많이 사라질때쯤
궁금한 게 생겼다.
'거품은 금방 또 생길텐데
바로바로 걷어내려고 할까?
아니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걷어낼까?'
그래서 아무말 않고 어떻게 하는지 기다려봤다.
거품이 별로 없어서 할 일이 사라지자
아이는 국물을 골고루 젓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거품이 어느 정도 모일 때까지 기다리더니
다시 거품을 걷어냈다.
시간이며 재료 분량이며
거품을 걷어야하는 타이밍이며
모조리 다 애매한 것들 투성이라
요리가 어려운건데.
주부로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주부같이 야무진 녀석이었다.
사람마다 살림 스타일이 다르긴 하지만
거품이 생기자마자 바로바로 걷는 건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다.
거품이 너무 얕아서 국물이 더 담길 때가 많고
거품을 걷는 행동도 여러번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품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 제대로 모아서
두세번 만에 걷어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수학 연산 잘 하고,
학교에서 배운 거 줄줄 외는 모습이 아니라
나는 오히려 이런 모습을 볼 때
아이를 더 믿게 된다.
거품을 걷어야 할 최적의 타이밍을 이렇게 딱 맞추다니
넌 이미 된 놈이야. 잘될 놈이야.
내가 진짜 멋진 아이를 낳았다는
가득 차오른 기쁜 마음과 함께(딱히 내색하진 않고)
가족들과 떡국을 맛있게 나눠먹었다.
점심 먹고 쉬고있는데,
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둘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한다.
둘째 : 형아야. 엄마는 근데 기억력이 안좋아
형아 : 아니야! 엄마 기억력 얼마나 좋은데~ 엄마는 내 이름도 알고 니 이름도 알고 우리 가족 이름 다 기억해!
(첫째야. 너 지금 그게 주장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는 말이니)
무조건 엄마편인 첫째가
내 편을 들어주려고 다급하게 찾아낸 이유가 고작
가족들 이름을 기억하는 거라니.
그 마음,
무조건적인 엄마 사랑이 고맙고, 다급하게 편들어주고 싶고 한 거 다 알겠으면서도
순간적으로 6학년 아이의 미래를 살짝 걱정했다.
그 사이 둘째가 치고 들어온다.
둘째: 아니 그건 당연한거잖아ㅋㅋㅋ무슨 말이야 그게ㅋㅋㅋㅋ
그리고 나는 나대로
애들 앞에서 얼마나 나사빠진 모습을 자주 보여줬길래
둘째가 그런 소리를 하는걸까 싶어서
급히 나를 되돌아보았다.
순간순간
'아 그래 이거다!'
싶은 순간들이 있긴 하다.
이 못난 어미를 한없이 감싸주는 속 깊은 형아와
미래가 걱정되지 않는 둘째 덕분에
엄마가 사는 게 너무 재밌어 얘들아
아이가 어릴 땐 천진난만한 순간이 너무 신기하고
언젠간 이 시기도 지나갈 걸 생각하니 또 너무 아깝고
그래서 아이가 크면 이런 날도 별로 없겠지 싶었는데
우리 첫째 덕분에 엄마가 오늘을 기억하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