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전능한 그대여, A man.

<깊이보다는 넓게, '관리'의 신이 나타나다>

by 난새

회사생활백서 004 : 전지전능한 신같은 존재


​회사에서는 본인이 맡은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역량을 가지고, 성과를 내야 한다. 때문에 누구보다 그 분야에서 제일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대체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능력자'라고 부른다.

​능력이 없으면 열정이 있어야 하고, 열정이 없으면 겸손해야 한다. 그런데 겸손하지도 못하면 눈치라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능력보다 '눈치'가 성공의 열쇠가 될 때

​그런데 회사에서는 능력만 있다고 성공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물론 능력이 있으면 성공할 확률이 매우 크다. 하지만 능력만 100%가 아니다. 왜냐하면 회사는 기본적으로 혼자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고, 게다가 회사 규모가 크다면, 또 R&R이 부서마다 부여되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간혹 눈치가 있는 사람이 성공하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매우 그렇다.


​눈치, 의전, 그리고 포장: 생존의 기술

​능력은 부족한데 눈치가 상당히 빠르면, 공손해 보이고, 때로는 생존을 위해 이것저것 눈치 보며 마음을 다해 열의를 보인다. 이 모습이 자칫 '능력 있군'으로 착각하게 되는 순환고리가 탄생한다.

​그러니 엄청난 눈치로 공손해야 할 때(만), 어떻게든 성과를 빼오기 위해 열의를 갖는다. 그리고 마지막 의전과 포장으로 성과를 만들어 간다.

눈치가 곧 능력이니라.


​깊이 없이 넓게, 전지전능한 시니어의 탄생

​눈치가 곧 능력이 되는 이상한 세상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것저것 다 알아야 한다. 깊이는 필요 없다. R&R이 나눠져 있기 때문에 딥한 질문은 실무자에게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보통 이런 포지션은 시니어 직급에서 많이 보인다. 전지(全知)하고, 전능(全能) 하다. 예수님 같은 후광을 보이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깊이는 없지만 넓다. 근데 너무 넓어서 모르는 게 없어야 한다. 혹시나 사지로 몰려도 어찌어찌 다시 돌아온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니, 아멘.

<아..아..아..>
​끝없는 '확인'의 무한루프와 확인사살

​전지전능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다 알아야 한다. 핵심 요약본 외에 그에 따른 배경, 히스토리, 이슈, 기대효과는 당연하고 5W1H 관점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촘촘함으로 사안에 대한 모든 것을 머리에 넣어간다.

​그것이 본인의 생존 방식이다. 그래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끝이 없다.

그래서 마지막은 "확인해 보겠습니다"로 끝난다.

근데 끝이 아니다.

"확인해본다고 한 내용 확인했냐"라고 물어본다.

확인해본다고 한 내용을 확인했다는 답변을 받기 전까지 확인한다.

계속 확인한다.

인사말이 "확인했어요?"가 된다.

나의 답변이 "확인했습니다"가 나와도 또 확인할 사항이 생기는 무한루프에 빠진다.

진짜 확인사살이다.

마음속으로 주기도문을 외워도 안된다.

주기고 도문이고 진짜 내가 (粥)이고 싶을 때가 있다.


​존재 증명을 위한 '걱정의 허브'

​의전이 기본 장착 무기라서 본인이 모르면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세상 근심 걱정 모두 나에게 오라" 이런 식이다. 그래서 걱정이 많은데, 문제는 그 걱정을 전가시킨다.

그래서 그의 책상은 언제나 세상의 모든 이슈가 모이는 '걱정의 허브'가 된다. 하지만 그 걱정은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다. 본인의 존재 증명을 위한 것이다.

​"이거 확인해 봤어요?"

"저건 왜 그렇죠?"

"혹시 모를 리스크는요?"

​그의 '전지함'은 실무자의 보고서와 메일함에서 나오고, 그의 '전능함'은 '확인했냐'는 추궁에서 나온다.


​'확인'이라는 이름의 성스러운 의전(儀典)

​그렇게 전가된 걱정은 곧 '회의'라는 이름의 제단에 실무자들을 제물로 바친다.

이미 다 확인됐고, 사실 다 해결된 일이다.

하지만 그는 몰라야 한다. 아니, 모르는 척해야 한다. 그래야 '확인'이라는 성스러운 의전(儀典) 행위를 수행할 수 있으니까.


​실무는 부하가, '관리'는 그가

​깊이는 없지만, 모든 보고 라인의 정점에 군림한다. 그는 오늘도 '파악'하고 '조율'하며 '관리'한다.

물론, 실제로 파악하고 조율하고 관리하는 것은 실무자의 몫이다. 그는 그저 확인하고, 또 확인할 뿐이다.

전지전능한 그대여, 부디 우리를 이 무한루프에서 구원하소서.

아멘.


​'전지전능한 그대'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가

​먼저 그와 일할 때 나타나는 세 가지 특징, 즉 '성흔(聖痕)'부터 알아야 한다.

첫째, 그는 모든 일의 '병목'이 된다.

그의 '확인'은 곧 '승인'이다. 아니, 승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성사(聖事)'다.

그의 확인 없이는 단 한 줄의 코드, 한 장의 보고서도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실무는 이미 끝났다. 하지만 그의 '확인'이 끝나지 않았기에 우리의 퇴근도 끝나지 않는다. 일은 우리가 하지만, 시작과 끝은 그가 정한다.

둘째, 그는 '실무'가 아닌 '맥락'을 묻는다.

R&R 뒤에 숨어 깊이 있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대신 "이게 왜 필요한 거죠?", "그때 그 배경이 뭐였죠?", "이해관계자는 누구죠?" 같은, 왠지 모르게 거대하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답을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확인'의 무한루프가 시작될 뿐이다. 그는 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이 모든 '맥락'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셋째, 나의 '성과'는 그의 '관리'가 된다.

모든 보고는 그를 거친다. 그는 정보의 '허브'이자 '게이트키퍼'다.

내가 밤새 이뤄낸 성과는, 윗선에는 "제가 관리하는 파트에서 챙긴 부분입니다"라는 한 줄로 요약된다. 우리는 그의 전능함을 빛내기 위한 부품이자 실적이다. 나의 피, 땀, 눈물은 그의 '관리 능력'을 증명하는 성배가 된다.


​그대를 위한 단 하나의 해결법

그렇다면 해결법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

그를 바꾸려 하는가? 전지전능한 신을 바꾸려는 인간의 오만이다.

그에게 능력(실무)을 요구하는가? 그것은 그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이단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법'은, 해결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을 영혼 없이, 그러나 완벽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선제적 의전 보고'다.


​궁극의 생존법: 선제적 의전 보고

그가 "확인했어요?"라고 묻기 전에, "확인 완료했습니다"를 먼저 던져라.

그가 '걱정'을 전가하려 입을 떼기 전에, '혹시 모를 리스크에 대한 검토 자료'를 미리 내밀어라.

그의 질문을 예측하고, 그 질문이 나올 구멍 자체를 막아버리는 것이다.

​깊이는 필요 없다. 그가 알아볼 수 있도록 '포장'하고 '요약'하면 된다. 우리는 실무자가 아니다. 그의 전능함을 보좌하는 '의전 비서관'이다. 바둑으로 치면 한수 앞을 보는 게 아니다. 적어도 십수 앞을 봐야 한다.


​신앙의 싸움, 그리고 오늘의 기도

결국 이 싸움은 능력의 싸움이 아니다.

누가 더 지치지 않고 '확인'의 제의를 올리느냐는 '신앙'의 싸움이다.

그가 만족할 때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라. 영접하라.

그것이 이 이상한 세상에서 우리가 생존하는 유일한 길이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A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