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FM 원칙주의자의 완벽한 성적표

<F학점의 항변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착각>

by 난새

혹시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실패의 죄책감을 퉁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흔히 땀 흘린 만큼 결과가 나오는 ‘교과서적인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회사는 종종 이 믿음을 배신한다. 누군가는 대충 넘겨짚기로 노다지를 캐서 박수를 받고, 누군가는 손가락 지문이 닳도록 보고서를 써도 먼지만 남긴다. 이럴 때 우린 혀를 끌끌 차며 말한다.

“저건 다 운이야, 순 얌생이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보자. 그 혀 차는 소리 밑바닥에는 ‘나도 저렇게 편하게 성과 좀 내보고 싶다’는 부러움이 끈적하게 깔려 있다는 것을.


​진짜 비극은 여기서부터다. 결과가 어찌 되든 흠집 하나 없는 ‘FM(Field Manual)’의 길만 걷겠다는 고집쟁이와 함께 일하는 고단함 말이다. 그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프로세스를 읊조린다.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플랜 B 또는 C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결과 F다.

​그의 세계에서 회의록은 성경보다 경건해야 하고, 결재 라인은 조선시대 의전보다 엄격해야 한다. 오타 하나 없는 보고서, 자로 잰 듯한 줄 맞춤. 심지어 폰트 크기가 11포인트인지 11.5포인트인지를 두고 인생을 건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과정만 보면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없다. 겉보기엔 정말 일을 '미치게'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딱 거기까지라는 점이다. 그는 과정이 마치 결과라도 되는 양 온 에너지를 전력투구한다.


전쟁터에서 적군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는데, 총기 손질 매뉴얼 3단계를 안 지켰다며 총을 다시 분해하고 있는 격이다. 뚜껑을 열기도 전에 이미 ‘망삘’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도, 그는 플랜 B를 거부한다. 왜? 매뉴얼에 없으니까. 그에게 프로세스는 건드려선 안 될 신성불가침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수개월의 대장정 끝에 최종 성적표가 나온다. 결과는 처참한 ‘F’.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그를 진짜 힘들게 하는 건 이 ‘F’가 아니다. 그는 그 점수를 인정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억울해하며 항변한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F라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절차를 완벽하게 지켰는데, 결과가 나쁜 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다!”

​이쯤 되면 노력이 면죄부가 되고, 프로세스는 무적의 방패가 된다. 열심히 했으니 실패할 권리가 있다는 이 ‘비효율의 끝판왕’을 마주하는 순간, 동료들의 혈압은 성층권을 돌파한다.


정작 배는 가라앉고 있는데, "저는 규정대로 구명조끼를 예쁘게 접어두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선원을 보는 기분이다. 회사의 자산은 녹아내리고 동료들은 탈진하는데, 정작 본인은 숭고한 희생자 코스프레를 한다.


​정도(正道), 참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광속으로 변하는 세상에서 유연함 없는 정석은 속도를 늦추는 발목 복숭아뼈의 족쇄일 뿐이다.


​우리는 과정의 가치를 무시해선 안 되지만, 가끔은 프로세스를 적당히 깨부수는 ‘결과 중심적 용기’도 필요하다. 시장은 매뉴얼만 달달 외운 모범생에게는 절대 사탕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Process is perfect"라는 환상은 휴지통에 버리자. 대신 "Result is King, Speed is Queen"을 외쳐야 할 때다.


100% 준비하느라 기회라는 열차를 떠나보내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가끔은 정도(正道)라는 예쁜 캔버스를 찢어버리고, ‘성공’이라는 낙서를 휘갈길 줄 아는 뻔뻔한 용기가 진짜 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