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하이드

<자리를 '지키기'위해 '지킬이' 된 사람들>

by 난새

"그는 방금 전까지 '사람'이었다. 적어도 회의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

​흔히들 말한다. 감정이 태도가 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이 격언은 사실 직장에서 탄생한 처절한 경고문에 가깝다. 그러지 않고서야 한 인간의 인격이 결재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토록 기괴하게 뒤틀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 우리 팀에는 낮에는 선망받는 과학자였다가, 어느 순간 괴물로 변해버리는 소설 속 주인공, '지킬 앤 하이드'가 실제로 살고 있다.


​사실 동료로서 업무적 예민함은 기꺼이 견딜 수 있다. 일터에서 마주하는 스트레스는 공공의 적이니까. 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순간은, 회사와 아무 상관없는 본인의 사적인 결핍이나 그날의 컨디션을 팀원들의 머리 위로 오물처럼 쏟아낼 때다.

​아침 10시 32분. 사무실의 공기는 일순간 진공 상태가 된다. 스삭거리는 서류 소리 너머로 소리 없는 '모스부호'가 긴박하게 흐른다.

..__. ____.. .. .? ......__...!?

해석하자면 이렇다. "지금 그 사람, 인격 로그인 상태 어떠니?"


​답변은 주로 '날씨'로 돌아온다. 맑음, 흐림, 때로는 폭풍전야. 가끔은 비극적인 사고도 발생한다. 이전 팀원이 평화로운 분위기로 감지해 보낸 잘못된 신호 때문에, 뒤따라 들어간 팀원이 폭풍을 정통으로 맞기도 한다.


때로는 요일이 기준이 되기도 한다. "오늘은 기분이 월요일 아침이니까 급한 거 아니면 피해라", "오늘은 태도가 금요일 오후 분위기니 사고 친 거면 지금 보고 올려라" 같은 식이다. (근데 진짜 사고를 친 보고는 금요일 오후에 하지 말자.)


​결재판을 들고 보고를 하러 가는 순간, 인자했던 지킬은 사라지고 광기에 찬 하이드만 남았다면 이미 늦었다. 최소한의 내상을 입고 싶다면, 혹은 불필요한 추가 과업을 얻어오고 싶지 않다면 비법은 하나다.

<누구냐 넌,>

눈동자를 약 30도 아래로 내리고, 15~20초 간격으로 일정하게 고개를 끄덕일 것.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마라. 네. 네 알겠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이 패턴을 계속 반복하자. 너무 죄송하다고 하면 이미 그로기 상태처럼 보여서 더 뚜까 팰 수 있다. 내 앞에 메두사가 있다고 최면을 걸며, 절대 눈은 마주치지 말고, 어깨선을 평소보다 안으로 굽혀 최대한 순종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상책이다.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은 지킬과 하이드 사이의 그 거대한 간극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이들에겐 특정 인물 앞에서만 발휘되는 '마법 같은 통제력'이 있다. 상사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지킬이요, 팀원에게는 잔혹한 하이드가 되는 그 '선택적 인격'.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킬'려고, 기꺼이 상사 앞의 '지킬'이 된다. 가끔 경영진 보고에 동석해 그의 옆모습을 볼 때면 소름이 돋는다.

'저 사람이 저렇게 치아가 가지런한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환하게 웃는다. 목뼈 하나가 잠시 빠진 것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낯설다 못해 기괴하다.


중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될 때 그가 나를 쳐다보면, 나 역시 거울을 보듯 똑같은 표정을 짓게 된다. 왼쪽으로 고개가 슬며시 돌아가면서 왼쪽 입꼬리가 누군가 당기는 것처럼 같이 올라간다. 눈꼬리는 입꼬리에 반비례해서 아래로 내려간다. 잠시 마리오네트가 된 듯한 기묘한 기분이다. 하지만 보고가 끝나고 회의실 문이 닫히는 찰나, 그는 다시 내가 알던 하이드로 신속히 복귀한다.


​지킬 앤 하이드 같은 상사와 일할 때는 상황 파악이 유일한 생존 전략이다. 매일 아침 오늘의 날씨처럼 그의 컨디션을 체크해야 한다. 여름날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그 장단에 맞춰 순발력 있게 '자진모리장단'을 출 수 있는 해학이 필요하다.


​그의 이중적인 인격이 본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지, 아니면 타고난 기질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그가 하이드로 변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지킬의 인격을 유지하며 자진모리장단을 춰야 하는 서글픈 '직장인 예술가'들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