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최최종의 늪 : 디테일에 빠진 배수의 진

<자, 이제 진짜 마지막이야>

by 난새

​보고 시간 딱 1분 전. 사무실에는 평온한 정적 대신 비명이 흐른다. 정확히는 프린터기가 비명을 지르며 종이를 씹어먹는 소리와, 누군가의 욕설 섞인 절규가 함께한다. 이 아수라장의 중심에는 늘 그가 있다. 이름부터 비장한, 우리 팀의 '배수진'씨.


​"음... 마지막으로 이것만 한 번 해볼까?"

​보통 디자인 관련 팀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곡소리'이다.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 파일명은 생태계의 진화를 거듭한다. 최종, 최최종, 진짜최종, 제발끝내자최종, 하느님맙소사최종달새... 단군 신화급 서사를 품은 파일명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늘 배수의 진을 치고 나에게 수정을 강요한다. 따지고 보면 '마지막 디테일'이라는 근사한 단어로 포장한 그의 고집은 사실 대세에 전혀 지장이 없는 티끌 같은 피드백일 뿐이다.


그런데 왜 자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것인가. 폰트를 키웠다 줄였다, 순서를 바꿨다 뒤집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그의 손가락 끝에서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주어진 시일을 아주 '알차게' 다 쓴다. 오늘 오전 11시 30분이 보고라면, 11시 29분에야 비로소 하명을 내린다.


"자, 이제 출력해 와."


​그 한마디에 평화롭던 사무실은 순식간에 재난 영화 세트장이 된다. 나는 잉크 냄새 진동하는 프린터기 앞으로 전력 질주한다. 제길, 하필 이럴 때 A4 용지가 없다. 손을 떨며 용지를 채우고 겨우 출력을 돌리는데, 15페이지, 16페이지, 17페이지, 드디어 마지막 18페이지,

<어? 조졌네 이거..>

'드르륵— 컥!'

​망했다. 종이가 씹혔다.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아니, 이 시간에 종이가 씹혀? 아 십팔!'


​배수진 씨는 달려와 지금 뭐 하느냐며 나를 다그친다. 아니, 그러니까 왜 그 직전까지 피드백을 하는 거냐. 경영진 집무실로 전력 질주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중얼거리며 속삭이듯 외친다.

"아 마지막 18페이지가 걸리다니. 아, 18페이지 안 가져가셨는데 어쩌니 십팔ㅍ.."


​보고가 끝나면 결과는 늘 둘 중 하나다.

1) 운 좋게 잘 넘어갔거나,

2) 혹은 그가 '디테일'이라며 목숨 걸었던 보고가 본질적인 목적에서 이미 '나가리'가 됐거나.


​더 짜증 나는 건 그다음이다. 보고가 잘 넘어가면 본인의 디테일 덕분이라며 어깨를 으쓱대고, 보고를 망치면

"그래도 우리 끝까지 진짜 최선을 다했잖아"

잠시 그 상황의 최선으로 위로하고,

"근데 자기는 쫌 손이 느리긴 하다. 일단, 그 18페이지 좀 다시 보자"


​그는 오늘도 승리감에 취해 유유히 강을 건너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멋대로 버리고 간 '배수의 진' 뒷수습은 늘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아마 본인을 '마지막까지 치열한 완벽주의자'라고 믿겠지만, 심리학적으로 그는 그저 '마감 임박 효과(Deadline Effect)'가 주는 짜릿한 자극에 중독된 스릴러 마니아일 뿐이다.


​그에게 11시 29분의 비명 소리는 업무의 소음이 아니라, 자신의 뇌를 깨우는 배경음이다. 문제는 그가 혼자 즐겨야 할 아드레날린 파티에 팀원 전체를 강제로 초대해 '물귀신 작전'을 펼친다는 것이다.


그가 친 배수의 진은 적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감이 주는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는 위험천만한 불놀이였다.


이 지독한 '아드레날린 마니아'에게서 살아남으려면, 우리도 치밀해져야 한다. 가장 추천하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디테일’의 먹잇감을 미리 던져주는 것이다. 이른바 심리학적 '미끼 효과(Decoy Effect)'다.


완벽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은 뭐 하나라도 고치지 않으면 본인이 일을 안 했다고 느끼곤 한다. 그러니 기획안 전체 흐름에는 지장이 없지만, 그가 딱 좋아할 만한 폰트 크기나 자구 수정 거리 같은 ‘의도된 미끼’를 눈에 띄게 하나 남겨두자.


​그가 미끼를 낚아채 "음, 이거 좀 고쳐봐"라고 한마디 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는 승리감과 함께 만족스럽게 강을 건너갈 것이다. 물론, 그 미끼를 물고도 "이것도, 저것도 고쳐봐"라고 나온다면... 그날은 깔끔하게 망한 거니 포기하면 편하다.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면, 당신도 참 고생 많으시네요. 오늘도 무사히 강 건너편으로 그를 보내길 바랍니다.


힘내세요.

이전 10화팩트보다 촉! 무당 같은 노스트라다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