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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Jan 11. 2023

항상 예상을 뒤엎는

슬램덩크 너란 녀석...

슬램덩크는 늘 내 생각과 다르다.



90년대를 학생으로 보낸 이에게 <슬램덩크>는 무척 친숙한 작품이다.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빌려오면 쉬는 시간에 조금씩 얻어 보던 내게 '강백호'는 히어로(?)가 되었다. 한참 만화책이 돌고 나서 친구들은 맘에 드는 캐릭터의 팬을 자처했다.


"나오미, 너도 슬램덩크 읽어봤어?"

"응, 지난번에 진희가 빌려왔을 때 조금 봤지."

"너는 누가 젤 좋아?"

"나는 강백호!"

"뭐라고? 강백호?"

"응."

"대체 왜?"

"(의아해하며) 너무 멋있잖아! 너는 누가 젤 좋아?"

"나는 서태웅! 잘 생겼잖아~"

"니들 슬램덩크 이야기하는 거야? 난 송태섭!"


그렇다. 나는 강백호 팬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41세까지도. 친구들은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말하는 내 태도 때문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진실을 은폐(?) 해준 것 같다. 왜냐하면 2년 전, 우연히 슬램덩크 TV 애니 속에 내가 아는 강백호는 없었기 때문이다.


반항심만큼 대단한 능력을 가진 강백호.

말하는 본새는 밉지만 속은 깊은 강백호.

감독에게 좀 까불긴 하지만 그럴만한(?) 강백호.


충격이었다. 오랜 기간 나를 대신해 답답한 상황에서 속 시원하게 변호를 해주고, 하고 싶은 일에 끊임없이 도전할 힘을 주었던 강백호! 그가 준 용기는 거짓이었을까? 1편도 다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같은 세대 지인에게 물어보니 원래 그게 강백호이고 원작 만화에서도 그렇다고 했다. 절망적이었다. 아무래도 충분히 슬램덩크를 즐길만한 시간이 학창 시절의 내게 주어지지 않았나 보다 하며 중년의 나의 강백호를 조용히 가슴에 묻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바타 2: 물의 길>을 보러 영화관에 갔다가 슬램덩크 극장판이 개봉한다는 예고를 보게 된다! 사실 강백호의 오랜 팬이지만 그의 실체를 모르는 나로서는 오히려 이번 기회에 제대로 슬램덩크를 알아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무런 정보 없이 극장에 가기로 결정했다!


아뿔싸! 슬램덩크란 녀석! 이번에도 예상을 뒤엎었다. 슬램덩크가 웃긴 만화이고 강백호는 능력치만큼 매우 성격 변화가 크고 짓궂은 캐릭터라는 걸 받아들였으니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것을 많이 보겠지? 하며 자리에 앉았다가 2시간 내내 펑펑 울고 만 것이다!


이미 개봉한 지 꽤 되었으니 스포라 하기엔 늦은 감이 있어 살짝만 언급하려고 한다.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강백호가 아니었다고! 그렇다고 백호의 코믹스러운 면을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게 주가 아니란 게 함정이다. 코미디 빅리그 구경 갔다가 훌쩍훌쩍 울고 온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번 극장판! 퍽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첫째, 영화를 만든 현지어로 들을 수 있어서였다. 직접 제작한 나라의 언어로 듣는 것이 더 감각적으로 와닿는다는 걸 많이 경험했기에. 시골에 있을 땐 영화 보러 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는데 대구에서는 '자막'을 제공하는 일본영화를 볼 수 있어 감동이다!


둘째, 90년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여서다. 옛날 사람인 나로서는 요즘 아이들이 서로를 괴롭히는 것을 볼 때 무섭다. 학생 때는 일진들이 무서웠지만 슬램덩크가 담고 있는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학교에서 학생들이 치고받고 하는 건 왠지 모를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이유가 있는 주먹다짐이랄까? (절대 폭력을 찬성하는 건 아니다. 상대적인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 그리고 학생들이 입은 체육복 바지가 너무나 옛날 스타일이어서 정감이 있었다. 요새는 줘도 안 입을 것 같은 통 크고 밑단 넉넉해서 질질 끌리는 트레이닝복 바지.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셋째, 일부러 쥐어짜지 않아도 너무 슬플 수밖에 없는 이야기여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사람은 주인공의 '엄마'였는데, 계속해서 검은색 위주의 옷, 화장기도 표정도 없는 얼굴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정들이 해소되고 결말에 다다르면서 하얀색 상의로 바뀐다. 그걸 보는데 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역시 우울증일 때 거의 무채색만 입고 다녔기에 보는 내내 '너무 안 됐다'는 마음이 자꾸 들었다. 많이 슬프고 맘이 무거우면 밝은 옷이 손에 잡히지 않는 법이니까.


넷째, 원작 만화가가 인체의 비율을 잘 이해하고 그림을 그린 작품이라서다. 요새 일본 애니는 예전에 아주 인기 많았던 작품들을 리메이크하는 것이 대세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요즘 작가들이 쉽고 편하게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너무 얕게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해 본다. 개성이 넘치는 작품은 많지만 잘 그린 그림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다. 게다가 스포츠 만화는 움직이는 표현이 많아 인체 비율이 깨져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3D로 제작하면서 그런 부분이 잘 조정이 된 것 같아 만족스럽게 관람했다.





<슬램덩크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슬램덩크를 책이나 TV 애니로 본 3040 세대에 한번 보고 싶다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제멋대로의 상상을 하고 아무 대책 없이 극장에 들어가면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진짜 슬램덩크'를 마주할 수 있었고, 학창 시절 아예 관심조차 주지 않던 인물에 매력을 느끼는 내가 참 재밌었다.


시간이 흐르고

강백호도 흐르고

슬램덩크도 흐르고

나도 그만큼 흘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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