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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해 Oct 29. 2020

김밥과 일의 상관관계


김밥은 먹기엔 참 편하지만 만들려고 하면 귀찮은 음식이다. 밥도 있어야 하고, 들어가는 각종 야채를 예쁘게 길쭉하게 썰어야 하고, 볶아야 한다. 계란이라도 넣을라치면, 계란 프라이도 이쁘게 해야 하고, 또 예쁘게 썰어야 한다. 이 모든 걸 이쁘게 넣어, 이쁘게 말아, 이쁘게 썰어야 한다. 아름다움의 향연이다.


여느 4살 아이들의 식성은 다 비슷하겠지만 딸아이는 야채를 좋아하지 않는다. 식감 때문인지 맛 때문인지 잘 안 먹는다. 말로는 "난 야채를 잘 먹어"라고 하지만 막상 당근을 주면 똥 씹는 표정으로 먹는다. 브로콜리는 뱉는다. 야채를 많이 먹여야 하는데, 귀찮다고 똥 손이라고 자꾸 야채는 뒷전이 된다.


저녁에 주문하면 아침에 배송되는 훌륭한 배송 시스템을 가진 앱들이 많아졌다. 우연히 한 곳에 어린이 김밥세트를 발견했다. 단무지, 당근, 햄, 김, 밥에 넣을 참기름이 들어 있어서 밥만 준비해서 말기만 하면 되었다.


야채라고는 당근 뿐이지만 이거라도 먹이겠다는 생각에 주문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슬라이스 치즈까지 넣고 말았다. 진짜 쉬웠다. 빨리 다 말아서 먹여야지 생각하다 마음을 바꿨다. 아이에게 스스로 김밥을 만들게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냥 내가 만들어서 먹이는 게 빠르고 쉽고 효율적이다. 아이가 김밥을 만들면 엄마 입장에서는 귀찮다. 손에도 묻히고, 그 손으로 식탁과 자기 옷에 대충 닦고, 흘리고, 장난치고... 치우는 게 더 일이다. 하지만 안 먹는 음식도 아이가 같이 참여해서 만들면 잘 먹는다는 글이 기억났다. 아이에게 재료를 주고 만들어보라고 했다.


모양이 조금 엉망이지만, 들어간 내용물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스스로 만든 김밥이 자랑스러운지 아이는 함박웃음이다. 그리고 한입 야무지게 베어 문다!


"엄마 맛있어!"


만드는 게 더 재미있는지 신나게 만들고, 먹는다.


작은 김밥 하나도 내가 만들면 맛없던 채소도 맛있고,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회사일을 돌아본다. 회사에서 일이 재미없을 땐 대부분 시키는 대로 하고 해야 할 일만 할 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그냥 주어진다. 그 한계 내에서만 할 수 있다. 내 아이디어로 뭘 더 바꾸거나 개선하기도 어렵고, 다 했다고 해도 내 거가 아니다. 책임도 없고 권한도 없는 일, 그런 일을 할 때 일과 나는 분리되고, 일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일은 일이다. 일은 사람이 한다. 사람은 노력하고, 일을 해내고, 그 과정을 통해 만족과 보람을 느끼는 존재다. 그런 보이지 않는 것이 없으면 나는 그냥 일하는 기계다. 일과 나는 분리되고, 일에 영혼은 없고 산출물만 남는다. 그래도 일이 잘 끝나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혼자 하는 일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대규모로 협업해야 하는 경우 큰 문제를 만들어낸다. 내 일이 아니라고 미루고, 주어진 내 일만 한다. 전체를 안 보고 부분만 본다. 커버되지 않는 영역이 생기고, 사람이 투입된다. 관리하고 모니터링하는 사람도 계속 투입된다. 그래도 일은 계속 구멍 난다. 품질도 좋기 어렵다.


큰 조직에서 생기는 이런 문제를 단지 김밥 스스로 말기라는 권한의 문제로만 보는 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권한이 있어야 책임감도 생기고 그래야 Ownership이 발휘된다. 내 거가 아니어도 전체가 보이고 이것저것 챙기면서 서로 뒤엉켜서 돌아갈 수 있다. 현재 내 업무 영역에서 내 자의적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어디까지 일까? 혹은 내가 스스로 어디까지 하고 싶은지 문득 생각해봤다. 저녁으로 김밥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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