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이었다. 가스레인지 아래 싱크대 서랍장을 열었는데, 시즈닝 봉투가 갈가리 찢겨있었다. 문에 걸려서 그랬거니 하고 무심히 넘기려다 찢긴 흔적이 예사롭지 않아 주변을 살폈더니 검고 동그랗고 길쭉한 무엇인가 보였다. 직관적으로 쥐똥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남편과 아빠를 불렀다.
쥐였다.
아파트 9층에 쥐라니.... 상상하지도 못했다. 들어올 곳을 생각해봐도 내 상식 선에는 없었다. 경비실에 전화하니 익숙한 일이라는 듯이 쥐덫을 가지고 와 설치해주겠다고 했다. 날이 추워지면 쥐들이 배수관을 타고 높은 층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15층에서도 잡을 때도 있단다. 검색해보니 아파트에서 쥐의 출현은 낯선 일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낯선 일... 그리고 공포스러운 일. 코로나로 병균과 세균에 민감해져서 더 무서웠다. 시즈닝이 있던 그 서랍장의 모든 물건은 쓰레기통으로 갔다. 해충, 쥐 방역 업체에 연락해서 방문을 요청했다.
쥐의 방문... 내 인생에서 쥐의 세 번째 방문이었다.
#첫 번째 방문
첫 번째 방문은 초등학교 때였다. 그때는 연립 1층에 살았다. 부엌 뒤 베란다 새시를 열면 바로 뒷마당이었다. 부엌 옆에는 나와 동생이 공부하는 공부방이 있었다. 그 방에는 책상과 책장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 방에서 숙제하고, 공부하고, 놀았다. 어느 날 엄마가 싱크대 아래를 보시더니 쥐가 있다고 하셨다. 신문지를 잘게 찢어 만든 둥지가 보였다.
구석에 숨어있던 쥐가 갑자기 후다닥 내 공부방으로 도망쳤다. 뒷 베란다 쪽으로 도망치지. 잘못된 방향을 택했다. 엄마는 그 방문을 닫고 며칠 두셨다. 굶어 죽게 두자고... 며칠 동안 그 방에 가지 못했다. 학교 갔다 돌아와 살짝 방문을 열어보아도 쥐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 쥐가 그 방에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무심결에 그 방에 들어갔다. 방바닥에 작고 검은 형체가 보였다. 회색의 작은 생쥐였다. 이렇게 작은 쥐를 굶어 죽게 하다니, 쥐는 그냥 살 곳이 필요해서 우리 집에 집을 지었을 뿐인데, 작고 작은 이 생명이 무슨 죄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어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때는 페스트나 쥐가 옮기는 병균 따위는 몰랐다...).
쥐를 휴지에 돌돌 말아 염을 하고, 쥐의 명복을 비는 글을 썼다. 어렴풋이 시 형식을 갖추어서 쓴 것 같다. 대충 내용은 죄도 없는 네가 이렇게 죽어서 가슴이 너무 아프다... 고통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라고 쓴 것 같다. 글을 쓴 종이도 함께 돌돌 말아서 테이프로 붙였다.
잠깐 나갔다가 돌아오신 엄마는 종이에 돌돌 말린 쥐를 보고 기겁하셨다.... 죽은 쥐에서 나왔을 여러 가지 병균들을 생각하셨겠지... 내 눈엔 안보였지만... 엄마의 놀람을 뒤로한 채 나는 쥐를 뒤뜰에 묻어주었다. 엄마가 왜 그렇게 놀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두 번째 방문
두 번째 쥐는 방문이라고 하긴 좀 그렇다. 고양이가 데려왔기 때문이다. 당시 집에 길고양이가 와서 엄마가 밥을 줬다. 길고양이는 잠시 우리 집에 집고양이처럼 머물렀다. 밥 주는 엄마가 고마웠던지 고양이는 거실에서 낮잠 자는 엄마 옆에 살포시 쥐를 놓고 갔다. 선물로...
#세 번째 방문
몇십 년 만에 만난 세 번째 쥐의 방문은 그때와 사뭇 느낌이 달랐다. 업체에서 설치한 끈끈이가 효과가 있었는지 설치한 당일 저녁, 쥐가 끈끈이에 걸렸다. 싱크대 아래 덜거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찍찍 소리가 들렸다.
저 쥐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저렇게 죽여도 되는 건가, 저 쥐가 옮긴 세균은 어떡하나 등등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를 두려움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를 꼭 안고 친정집으로 대피했다. 겁에 질린 나를 보며 딸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엄마 걱정하지 마, 쥐 안 무서워. 내가 지켜줄게. 막대기로 얍 얍 얍! 하면서."
그렇게 세 번째 쥐는 왔다가 갔다. 온 집안을 소독하고 지나간 흔적이 있는 곳의 물건을 모두 버렸다. 업체는 쥐의 페로몬이 다른 친구 쥐들을 부를 거라고, 날씨가 추워지니 배수관에 사는 시궁쥐들이 다시 또 올라올 거라고 한다.
이제 나에게 쥐는 미키마우스도 아니고 라따뚜이도 아니다. 서글프다.
안녕, 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