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소해 Feb 15. 2022

정신머리 하고는...

유독 정신이 없는 날이 있다.



정신이 없기보다는 멍해서 내 정신은 저 우주 저편에 혹은 잠에서 덜 깬 상태이고 몸은 좀비처럼 습관처럼 움직인다. 아무리 정신 차리려고 해도 몸과 분리된 정신은 자신만의 세계에 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정신은 딴 데 있으니 몸은 움직이긴 해야겠는데, 명령을 따로 내리진 않으니 늘 하던 대로 한다. 로봇처럼.


그날도 그랬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잠이 덜 깨서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암튼 이른 아침이었다. 근무시간을 채우고 일찍 퇴근하려 일찍 출근했다. 나는 딸아이와 안방에서 자고 남편은 작은 방에서 잔다. 남편은 잘 땐 방문을 닫고 주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 남편 방에 닫혀있는 문을 보며 늘 그렇듯이 자겠거니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그 문을 한 번 더 쳐다보긴 했지만 나왔다. 아이가 먼저 일어나 남편을 깨울 거라 생각하면서.


회사에 도착해서 가방을 열자 출입카드가 없었다.


이런. 어제 입은 패딩에 넣어두고 다른 코트를 입고 나온 거다. 안내데스크에 임시 출입 카드를 요청하고 기다리면서 그제야 핸드폰을 보았다.


핸드폰에는 남편이 카톡이 깜박이고 있었다.


"여보 나 오늘 일찍 출근했어."


오, 마이, 갓


남편의 카톡을 보는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당연히 남편이 집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자는 아이를 혼자 두고 출근한 것이다. 이동 시간을 계산해보면 대략 40분 동안 아이는 혼자 있었다. 5살 아이가 혼자 깨서 아무도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 아이는 얼마나 공포스러울까? 등골이 서늘하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다급하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원이가 혼자 있어요. 일어나서 울면 어쩌지? 얼른 가주세요."


천만다행으로 친정 엄마는 위층에 사신다. 나보다 더 놀란 엄마는 정신없이 내려가셨다고 한다. 다행히 아이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고 한다.


"넌 정신머리가...."


엄마의 잔소리를 한참 들으면서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긴장이 풀렸다. 다행이다. 아이에게 그런 공포스러운 기억을 심어주지 않아서...


뇌는 의사 결정에 5%만 사용하고 나머지 95%는 그 결정에 따라 실행하는 것만 신경 쓴다고 한다. 대부분의 활동은 잠재의식 상태로 움직이는 거다. 뇌의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훌륭한 메커니즘이지만 아닌 경우도 많다.


그 이후 아이와 관련된 활동을 할 때는 가능한 의식 상태에 있으려고, 무의식 상태로 반응적 행동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오늘도 남편 방문은 안 열어보고 나온 것 같다..... 남편의 생사도 확인할 겸 내일부터는 꼭 열어봐야겠다.


덧. 쓰고 보니 지난번 나는 오늘도 자동 플레이 중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어 반성했다. '그래. 또 그랬구나. 개선이 안되는구나'라고 자책하진 않겠다. '내가 이렇다는걸 적어도 의식은 하고 있구나' 생각하리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