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소해 Jun 04. 2019

관객을 기생충으로 만들어버린 봉준호

첫 영화 리뷰


이 영화를 택한 이유는 한 가지. 그냥 궁금해서였다. 봉준호라서, 칸 영화제 상을 받아서도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봐서도 아니었다. 제목이 기생충이라서, 그런데 기생충이 한 마리도 안 나온다고 해서. 아니 다 핑계다. 그냥 끌렸다.


기생충

설국 열차(2013)에도 벌레는 등장한다. 사람들이 벌레처럼 보이지만 대놓고 벌레는 아니다. 벌레를 먹을 뿐. 하지만 영화 기생충은 작정하고 등장인물을 벌레로 만들어버린다. 기택(송광호) 가족은 모두 ‘기’라는 글자, 아내조차 벌레라는 ‘충’이라는 글자가 들어간다 (기택, 충숙, 기우, 기정). 반면 박 사장네 가족 중 아이들의 이름을 보면 음성 그대로 다 가졌다(박 사장, 연교, 다혜, 다송).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소설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었다. 영화 기생충의 등장인물들은 어느 날 갑자기 기생충이 되었다.


기생충 스스로에 대한 생각이 영화에 다양하게 표현된다. 자신의 가족을 대놓고 벌레로 묘사하는 장면도 존재한다.


당신은 바퀴벌레야.
불이 켜지면 숨어버리는


기생충 중 한 명은 박사장 집에 살면서 간접적으로 누리게 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실 살다 보니 원래부터
내가 여기서 태어난 것 같기도 하고


기생충은 지배계급을 만나기 위해 하는 작업에 대해서 스스로 정당화한다.


내년에 전 꼭 이대학에 갈 거거든요 아버지
네가 자랑스럽다 아들아


지배 계급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부잣집 애들은 구김살이 없어
돈이 다리미야.
내가 이렇게 부자면 더 착해


수평 vs 수직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설국 열차가 다시 떠올랐다. 설국 열차에서는 수평적인 기차를 통해 계급을 표현했다. 쳇바퀴처럼 돌면서 미래를 알 수 없는 삶 속에서 사는 인간들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자신의 계급을 올리려고 하는 모습을 영화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반면 기생충은 물리적 지형의 높이를 통해 계급을 보여준다. 반지하에서 햇빛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과, 따뜻한 햇살을 삶의 일부로 품고 사는 사람들이 대비된다.


이 높이의 차이는 떨어지는 물의 낙차로 더 극대화된다. 영화에서 물은 세상의 풍파 그리고 돈을 상징한다. 부잣집의 물은 깨끗하게 담긴 통에 있거나, 거실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아이의 인디언 집조차 물을 막아낸다. 위쪽의 물은 미세 먼지를 씻어주는 쾌적함이지만 아래쪽의 물은 더럽다. 가난한 사람들의 물은 흘러와서 삶을 파괴한다. 변기의 물이 역류한다. 변기의 위치가 사람들이 지내는 방보다 높다. 똥, 배설물보다 낮은 존재라고 높이를 통해 보여준다.


선(Line)

수직선에 수평적인 선이 그어졌을 때 비로소 명시적인 상하가 구분이 된다. 박 사장이 끊임없이 말하는 선은 바로 이런 구분을 위한 선이다. 친절하게 대하지만 항상 선을 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삶의 불편함을 해결해주지만, 선을 넘지 말길 바라는 것이다. 이는 박사장이 가사도우미에 대해 말하는 장면과 기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선을 넘지 않아서 마음에 들어요. 2인분을 먹지만... 그만큼 또 하니까.


선을 아슬아슬하게 안 넘어


박 사장은 좀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선을 넘지 않기를 요구하는 반면 연교는 수동적으로 요구한다. 운전기사를 내보내고 기정에게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할 때 그녀는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선을 긋는다.

내가 사람을 좀 못 믿잖아. 아는 사람 아니면


악수를 청하는 기택의 요청에 그녀는 놀라며 말한다.


손 씻었어요?


아들 생일 파티를 위해 휴일에 출근한 기택과 대화 중 선을 넘었다 판단한 박 사장은 정색을 하며 말한다.

기사님 지금 근무 연장이죠?


박사장과 연교만 선을 긋는 것은 아니다. 기정은 이런 부분을 이미 간파하고 자신의 우위를 나타내기 위해 끊임없이 선을 긋는다. 자신의 계급이 살기 위해 가져야 하는 친절함과 양보, 이해라는 태도를 버리고 냉정하고 선 긋는 모습으로 지배계급을 코스프레한다. 가사 도우미에게 심지어는 다송이의 엄마인 연교에게 조차 도도하게 선을 긋는다. 그리고 이 방식은 먹힌다. 선을 긋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임이 강조된다.


영화에 북한 아나운서 흉내 내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고 감독도 그 장소가 북한 때문에 생긴 공간이라 넣은 거라 설명했다. 하지만 북한이야 말로 상하 계급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기 때문에 감독이 영화 속 공간으로 불러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직도 대놓고 계급이 존재하는 세계 유일의 국가. 암묵적으로 계급이 존재하는 자본주의보다 노골적인 곳으로 대비시키기 위해 설정했다고 해석했다.


냄새 vs 모스부호


계급을 가르는 선을 넘나드는 것은 바로 냄새이다. 냄새는 숨길 수 없는 계급을 드러낸다. 향기의 위력은 향수의 역사를 찾아보면 잘 알 수 있다. 향수는 신과 소통, 치유 등 다양한 방면에서 쓰였다. 기원전 이집트에서 만든 연고 냄새가 아직까지 유물에서 날 정도로 강력하고 지속적이다. 지배 계급의 끝판왕만이 누리는 좋은 냄새가 바로 향수였다. 영화 향수가 떠오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 장면까지 너무나 강렬하다. 주인공은 냄새를 통해 계급이 드러나는 생선장수 엄마에게서 태어났다. 이 엄마는 그 냄새를 이용해서 아이를 낳자마자 죽도록 생선 더미에 숨겨버린다. 길바닥에서 생선을 파는 삶.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생선 냄새에 찌든 삶. 피지배 계층의 강렬한 대표적인 냄새로 상징된다.


기생충에서 냄새는 계급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 선을 마구 넘나 든다. 냄새나는 두 계급이 한 공간에 존재하고, 몸을 대고, 안고, 키스를 한다. 독하게도 감독은 관객과 박사장과의 선을 냄새로 그어버린다.


지하철 타는 사람 특유의 냄새 있어


냄새는 영화의 반전을 이끌어 내는 도화선이 된다. 관객은 그 순간에 몰입한다. 선이 그어진 상태로.


냄새와 대조되는 것이 모스부호이다. 기생충은 자신을 먹여 살려주는 박 사장에게 감사의 뜻으로 모스부호를 보낸다. 모스부호는 선을 넘지 않는다. 일방적이며 조용하다. 보이지만 관심 없는 지배계층은 무슨 뜻인지 인지조차 못하거나 관심도 없다. 인디언의 정신을 이어받은 컵스카우트인 다송이만 이해한다. 실험에 따르면 사람은 권력이 많아질수록 타인에게 관심이 적어지고 맞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권력이 적을수록 상대의 반응에 민감하고 무슨 뜻인지 알려고 노력한다. 매일 몇 년간 지속된 모스부호의 감사는 한 번도 전달되지 않는다. 피지배계층의 이런 무해한 대화는 아무 임팩트를 주지 못한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리스펙트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등이 당겼다. 기생충으로 살아가는 가족들의 정체가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면서 봤기 때문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우리를 기생충인 기택의 가족에 이입한다. 그리고 지배 계층에 대한 부조리의 모습을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감독은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냄새가 나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할지 묻는다. 기택처럼 계획을 세워봤자 의미 없으니 일단 이런 세상에서 계획 없이 살지 아니면 기우처럼 계획을 세워서 그 집을 살지. 둘 다 마음에 안든다면 어떻게 할지.


그냥 세탁할 때 섬유 유연제를 좋은걸 쓰기로 했다.




작가의 이전글 I am sorry bu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