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펭수에게 열광하는가
목차
1. 들어가며
2. 세계관
3. 도전의 서사구조
4. '안티 꼰대' 정신
5. 자존감
6. 성 중립성 설정
7. 기후변화 이슈 부각
8. 공정성
9. 반전 매력
10. 나가며
펭수가 대세다. 펭수 얼굴이 들어간 굿즈라면 모두 ‘완판’이다. 완판 행진은 펭수의 에세이 다이어리 <오늘도 펭수 내일도 펭수>부터 시작됐다. 2019년 11월 28일 예스24에서 예약판매 개시 3시간 만에 1만 부가 팔려나갔다. 예스24는 펭수 캐릭터 상품을 독점적으로 유통 ·판매한 덕에 ‘펭수 관련주’로 불리며 주가가 크게 상승했다. 카카오톡의 펭수 이모티콘 <10살 펭귄 펭수의 일상> 역시 출시 하루 만에 1위에 올랐다.
시장에서 펭수 파워는 이미 입증됐다. 펭수를 가장 먼저 광고 모델로 섭외한 업체는 KGC인삼공사다. <펭수의 귀환>이라는 제목의 ‘정관장’ 광고는 1개월 만에 조회수 2000만 회를 기록했다. 동원 F&B, 코카콜라, SPC 삼립, 빙그레, 스파오 등도 펭수를 섭외해 콜라보 영상을 찍었다.
펭수가 어떻게 섭외 1순위 광고모델이 되어 기업의 주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 이래 1년도 채 되지 않아 2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끌어 모았는지 펭수의 성공 요인에 대한 분석이 넘쳐난다. 하지만 할 말은 하는 펭수의 캐릭터가 성공 요인이라는 단편적인 분석이 주를 이룰 뿐, 이를 깊이 들여다본 콘텐츠는 부재하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펭수의 성공 요인이 무엇인지 문화연구적 관점에서 하나씩 살펴본다.
펭수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세계관’이다. 사전적 의미의 세계관은 ‘자신이 사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세계관'은 게임이나 픽션 분야에서 사용되는 의미로, ‘배경 설정’이라는 뜻을 갖는다. 작품에서 묘사되는 세계 그 자체를 말한다. 즉, 세계관은 작품의 시나리오를 이루는 시간적, 공간적, 사상적 배경으로서, 작품의 이야기와 작품 속 캐릭터를 구상하는 뼈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 속 세계관은 사실 우리가 사는 세계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마블’의 세계관이 그 예다. 빅뱅 이전의 세계관을 묘사하거나, 미래 시점의 세계관을 창조한다. 반대로,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세계관을 구축하는 경우도 있다.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나, 실제 프로 선수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제작된 스포츠 게임 등이 이에 속한다.
오롯이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든, 현실을 기반으로 하든, 뚜렷하고 창의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관 설정이 해당 콘텐츠의 성패를 가르기 때문이다. 뚜렷하게 설정된 세계관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감정이입의 요소로 작용한다. 영화나 게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캐릭터의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해당 캐릭터의 탄생 배경을 알고 싶어 한다. 단순히 귀엽고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에 매력적인 세계관을 더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이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방탄소년단도 세계관을 잘 활용해 성공한 사례 중 하나다. ‘방탄소년단 유니버스(BU)’로 불리는 이 세계관은 마블의 세계관처럼 여러 작품이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방탄소년단은 멤버의 캐릭터에서부터 뮤직비디오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는 뼈대로 세계관을 활용한다. <학교 3부작>, <청춘 2부작>, <러브 유어셀프> 시리즈 등 앨범을 낼 때마다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으로 팬들을 끌어모은다. 팬들은 뮤직비디오 장면 속 숨어 있는 상징 요소를 찾아내고, 멤버들이 주인공인 <화양연화> 같은 웹툰을 보면서 ‘떡밥 회수’의 쾌감을 느낀다. BU는 ‘참여형 세계관’이라고도 불릴 정도다. 팬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회자되며 세계관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방탄소년단이 세계적인 팬덤 구축을 할 수 있게 만든 요인 중 하나다.
최근에는 캐릭터를 만들 때에도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일본의 ‘구마몬’이라는 캐릭터는 ‘구마모토현의 홍보대사이자 영업부장 겸 행복 부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다. 귀여운 외형에 입소문을 낼만한 세세한 스토리가 더해지니 상품성이 높아진다. 카카오프렌즈의 캐릭터들은 나올 때부터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귀여운 외모로 인기를 끌자 캐릭터에 새롭게 세계관을 입혔다. ‘라이언’이라는 캐릭터는 둥둥섬의 왕위 계승자였는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해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갈기 없는 수사자다. 이런 식으로 세계관을 설정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만드는 것이 지속 가능한 캐릭터를 만드는 요인이다.
반면, 독창적인 세계관을 설정하지 못해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인사혁신처가 ‘펑수’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논란을 자초한 것이 그 예다. 인사처 유튜브 영상에서 펑수는 자신을 ‘인사처 수습직원’이라고 소개하는데, 이름과 외모, 특기까지 펭수와 닮았다. 저작권도 문제지만, 자체적인 세계관 설정 없이 EBS가 만들어 놓은 세계관에 무임승차하려는 모습 때문에 빈축을 샀다.
<자이언트 펭TV>가 세계관을 설정한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펭수의 세계관은 ‘남극에서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어 한국으로 온 10살의 자이언트 펭귄’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세계관에 사람들이 빠져든 이유는 첫째, 너무 가상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도, 너무 현실의 세계를 다루지도 않아서다.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 남극에서 헤엄쳐서 한국까지 온 펭귄은 얼핏 현실 세계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뽀로로’라는 펭귄이 한국에서 활동 중이고, 그중에서 EBS 방송국에 있기 때문에 한국으로 왔다는 설정을 더해 사람들을 수긍하게 만든다.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다는 보편적 욕망을 담고, 친구가 별로 없었다는 일상 같은 이야기를 넣어 현실 세계와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도, 또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 세계관을 창조한 것이다.
둘째, 세계관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는 점 또한 사람들이 펭수에게 빠져들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례로, ‘마블’ 시리즈는 세계관이 복잡하기도 하고 이전 스토리를 알아야만 후속 편을 즐길 수 있다. 만약 펭수의 세계관이 마블처럼 복잡했다면 유튜브를 통해 <자이언트 펭TV>로 새로 유입된 사람은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고 느낄 것이다. 진입장벽을 낮추고 접근 가능성을 높인 전략 또한 유효했다.
펭수의 세계관은 주제곡에서부터 살펴볼 수 있다.
(G I A N T 펭!) 워-오- 자이언트 펭TV / 워-오- 자이언트 펭TV / 아아 놀랐다면 미안 이런 펭귄 처음이지 / 자이언트 펭~펭~에~(SOO) / 남극에선 혼자였지 남과 다른 덩치 / 원래 그래 특별하면 외로운 별이 되지 / 한국에선 노는 게 제일 좋은 펭귄 / 뿌르르? 삐리리? 암튼 스타라며 / 노는 건 내가 제일인데 한 번 볼래 / 아 구걸하려던 건 아냐 자이언트 펭TV / 음 그래도 구독하면 내가 잘할게 / 난 너의 평생 친구 자이언트 펭수 /워-오- 자이언트 펭TV / 워-오- 자이언트 펭TV / 난 하나뿐인 210cm / 자이언트 펭귄 크리에이터 펭 펭! / Yo, 자이언트 펭TV, Let's 구독
주제곡에서 드러나는 세계관은 먼저 210cm의 큰 키를 가진 자이언트 펭귄인 펭수가 주인공이라는 설정이다. 그런데 이 펭귄은 남과 다른 덩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향인 남극에서는 ‘혼자’였다.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긍정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뿌르르인지 삐리리인지 모르는 ‘암튼 스타’인 뽀로로 때문에 한국을, 그리고 EBS를 목적지로 선택했으며, “노는 건 내가 제일”이라는 자신감도 있다.
EBS는 펭수의 세계관을 적극 알리기 위해 홈페이지에 자기소개서를 정리해서 올려두었다. 자기소개서에서는 주제곡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나이와 현재 사는 곳이 추가되었으며, 헤엄을 쳐서 왔다는 사실과 존경하는 인물(나 자신) 등이 언급된다.
<자이언트 펭TV> 유튜브에 올라온 초반 영상 가운데 일산 초등학교 방문 전 펭수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있다. 이 영상의 초반부에서는 펭수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촬영 하루 전 일산 EBS’라는 자막이 나오면서 진행되는 이 영상에서는 펭수의 세계관이 자세하게 묘사된다. 펭수를 구성하는 중요한 세계관 중 하나는 펭수가 남극에서 한국으로 왔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영상에서는 헤엄을 쳐서 오는 모습을 CG로 넣어줌으로써 설정에 쐐기를 박는다.
또 이 영상에서 펭수는 “남극에서 친구들이 많았나 봐요”라는 질문에 머뭇거리다가 “아... 잘 못 지냈어요. 너무 커가지고 저랑 안 놀아주더라고요. 눈이 왜 이러냐고 눈을 왜 이렇게 뜨냐고. 나 그냥 뜬 건데”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이 같은 세계관을 접하며 두 가지 측면에서 공감한다. 먼저, 개성을 죽이며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 모두는 개별적 존재로서 특별함을 가지고 있는데, 사회는 그런 개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른 펭귄들과 다르게 '자이언트'하다는 이유로 친구를 사귀지 못한 펭수에게 감정 이입되는 이유다. 또,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건 비단 펭수만이 아니었다는 사실로부터 위안을 받는다. 현대사회에서는 인간관계의 피로도가 너무 높다. "친구가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펭수를 보면서 나만 힘든 것은 아니었다는 메시지를 수용하게 된다.
한편, 이 영상에서는 ‘매니저’라는 표현도 처음으로 등장한다. 제작진 인터뷰를 보면, 펭수가 제작진을 부를 때 ‘매니저’라고 지칭하기로 미리 정했다고 한다. 펭수가 의자에 앉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매니저를 부르고, 이러한 장면은 이후로도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펭수가 제작진을 '매니저'로 지칭하는 방식을 통해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지향하는 펭수의 캐릭터가 구축된다. 이러한 캐릭터가 구축되었기 때문에 PD에게 오라 가라 하거나, EBS 사장님을 "김명중"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일관된 캐릭터와 세계관으로 수용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펭수의 세계관은 회를 거듭하면서 점차 강화되고 있다. 그중에서 세계관 강화에 일조한 에피소드는 <펭수가 알고 싶다>라는 주제로 진행한 <[단독] 펭귄 의혹 전격 해부> 영상이다. 이 영상의 아래에는 “진짜 지독한 세계관”이라는 댓글이 달렸으며, 이 댓글은 약 6천 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서사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흐름과 이야기의 전개를 살펴보는 작업에 해당한다. 제작진이 마련해 놓은 특정한 서사구조를 파악하게 되면, 제작진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그리고 프로그램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펭수가 알고 싶다>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은 서사구조를 따른다.
1) (스튜디오) <그것이 알고 싶다> 형식을 차용한 이동현 기자의 오프닝
2) (EBS 내부) <자이언트 펭TV> 제작진 인터뷰
3) (야외) 닮은꼴 당사자인 개그맨 김민교 인터뷰
4) (체육관) 닮은꼴 당사자인 양치승 관장 인터뷰
5) (EBS 내부) 펭수 밀착 취재 시작 : 샤워하고 나오는 펭수 확인
6) (EBS 내부) 펭수 밀착 취재 지속 : 소품실에서 자는 펭수 확인
7) (EBS 내부) 펭수 밀착 취재 지속 : 옷장에 있는 펭수 확인
8) (EBS 내부) 펭수 직접 취재
9) (동물병원) 엑스레이 판독 결과 펭귄임이 밝혀짐
이 에피소드에서는 EBS 이동현 기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동현 기자가 실제 탐사 보도를 하는 것처럼 펭수를 밀착 취재하는 모습이 극의 전개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펭수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펭수 내장’이라고도 불리는 인형탈 연기자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는데, EBS는 이러한 현상을 이용해 오히려 펭수의 세계관을 강화하는 장치로 사용했다.
제작진은 현실에서의 궁금증을 해소해준다는 명목으로 ‘사실을 보도하는’, ‘진짜’ 기자를 투입시켜 펭수가 펭귄이 맞는지 직접 파헤친다. 기자는 “펭수가 카메라가 켜져 있을 때만 펭귄 일지 모른다는 의혹이 퍼지고 있다”는 의혹을 적극적으로 취재한다. 펭수와 닮은꼴인 ‘사람’ 두 명을 찾아가 인터뷰했고, 잠입 취재 형식을 빌려 펭수를 밀착 감시한다. 성과가 없자 결국 직접 인터뷰를 시도한다. 기자가 실제 취재하여 리포팅을 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결국 밀착 감시도 모자라 엑스레이 촬영에까지 이르게 된다. 전문가(수의사)는 엑스레이 촬영 결과를 보더니 “펭수는 펭귄이 맞다”라고 진단한다. 사람 뼈나 강아지 뼈와는 다르다는 수의사의 진지한 설명이 덧붙는다. 구독자들의 관심 어린 의혹을 유머로 승화함으로써 오히려 “지독한 세계관”을 설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펭수가 직접 나와 구독자들에게 영상 편지를 띄운다. 펭수는 펭귄이 맞으며, 펭귄 그 자체로 사랑해 달라는 메시지다. 이 에피소드 방영 이후 인형탈 연기자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팬들은 “펭수는 펭수다”, “눈치 챙겨”라며 또 하나의 유희를 즐기고 있다. EBS는 현실과 가상 사이의 균형 잡힌 줄타기에 성공하며 팍팍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게 됐다.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세계관과 더불어 중요한 또 다른 개념은 바로 ‘서사구조’다. 서사구조(Narrative structure)는 간단하게 말해 이야기가 결합되는 방식을 뜻한다. 이야기의 기저에 콘텍스트가 숨어있다는 말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예로, ‘신데렐라의 서사구조’가 있다. 불행한 여주인공이 조력자를 만나 일정한 테스트를 거쳐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신데렐라의 서사구조와 달리, 한국 대중문화에서 끊임없이 인기를 끄는 서사구조가 있다. 바로 ‘도전의 서사구조’다. 캐릭터를 가진 연기자가 등장해 도전하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전개 구조가 된다. 그 과정은 오프닝, 해프닝, 클로징의 구조를 가진다. 미션이 주어지고(오프닝), 미션을 해결해 나가며(해프닝), 미션에 대한 평가를 제시(클로징)한다.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MBC <무한도전>을 예로 들어 보자. 무한도전은 캐릭터가 뚜렷한 멤버들이 나와 그날의 미션을 확인하고, 이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성장하는 서사를 담고 있다. SBS <K팝스타>, Mnet <슈퍼스타 K>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들도 마찬가지다. 일반인 참가자들이 등장해 심사위원과 팬들의 평가를 받고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도전의 서사구조를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도전의 서사구조가 큰 인기를 끄는 이유는 현실 세계가 실제로 경쟁과 도전의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주 시청층인 2030 세대의 입장에서 볼 때 현실 세계는 지나칠 정도로 치열한 진입 경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다. 미국의 사회문화인류학 교수인 제임스 웨이치(J. V. Wertsch)는 특정 사회에는 ‘문화적 도구 세트(cultural tool kit)’의 일부로서 ‘스토리 저장고’가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대중문화 콘텐츠는 어떤 식으로든 사회의 고유한 갈등이나 모순을 대면한다는 것이다.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는 한국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콘텐츠에 고스란히 반영함으로써 감정이입을 유도한다.
<자이언트 펭TV> 공식 홈페이지의 프로그램 소개를 보면, “스타 크리에이터가 꿈인 펭수의 좌충우돌 성장기”를 그린다고 되어 있다. 펭수가 크리에이터가 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 본 프로그램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이렇게 보면 <자이언트 펭TV>의 서사구조는 우리의 인생 여정과 매우 흡사하다. 펭수를 보며 우리가 희로애락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펭수는 뽀로로와 BTS를 뛰어넘어 우주대스타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향해 도전해 나간다. 펭수 인생 여정의 길목에서 마주치는 상황들에 대해 펭수에게 감정 이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이언트 펭TV>가 가지고 있는 도전의 서사구조는 좀 더 특별한 점이 있다. 바로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목표 달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 주요 서사라는 점이다. 타 프로그램의 경우 도전의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어도 ‘타인과의 경쟁’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앞서 언급한 SBS <K팝스타>, Mnet <슈퍼스타 K>와 같은 오디션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경우, ‘합격과 불합격’, ‘생존과 탈락’, ‘분노와 동정’ 등의 이분법적 구조를 활용하면서 경쟁을 부추긴다.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심사위원들도 참가자들 중 실력자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이분법적 결정 권한을 행사한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오락적 요소는 높을지 몰라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약간의 불편함을 준다.
하지만 경쟁자가 ‘나 자신’이라는 펭수는 자기 자신과 경쟁한다. 어제보다 나아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펭수를 ‘무해함’이라는 단어와 연관시키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구독자 만 명 달성 이벤트 에피소드를 보면 이 같은 점이 두드러진다. 펭수는 우리를 도전의 여정에 동참하게 하면서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게 만든다.
그렇다면 실제로 <자이언트 펭TV>가 도전의 서사구조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EBS가 홈페이지를 통해 밝히고 있는 기획의도와 프로그램 소개를 살펴보았다. 공식 홈페이지의 ‘프로그램 소개’에서 “스타 크리에이터가 꿈인 펭수의 좌충우돌 성장기”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펭수가 최고의 크리에이터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겠다는 것이다. 또, 공식 홈페이지의 ‘캐릭터 소개’ 카테고리에는 펭수의 자기소개서가 있는데, ‘우주대스타’가 되는 것을 꿈으로 적고 있다. 펭수는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던 남극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키즈 콘텐츠와 K-POP으로 한류 신화를 이뤄낸 한국에서 최고의 크리에이터에 도전하겠다는, 출사표를 던진다.
이러한 기획의도를 바탕으로 제작진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제작하며 크리에이터에 도전하는 펭수의 모습을 그려낸다. 먼저, 유튜브에 올라온 <자이언트 펭TV> 영상 중 초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상은 펭수가 크리에이터 선배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 내용이다. 출연자는 SNS 스타 전지영과 유튜버 크리에이터 ‘흔한남매’다. 이들은 유튜버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기 위해 필요한 소양을 펭수에게 알려주고, ‘인싸’가 되는 비법을 전수한다. 다음으로는 홍대에 나가 버스킹과 댄스 배틀을 하며 계속해서 크리에이터에 도전하는 모습을 그린다. 또, 구독자 만 명을 달성하기 위한 라이브 방송을 하는 등 펭수가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실제 유명 기획사 아이돌 연습생이 펭수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이처럼 도전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 에피소드가 진행되다가 22, 23번째 에피소드에서 펭수는 걸그룹 데뷔를 위한 오디션을 보게 된다. 펭수는 연습생 신분이기 때문에 ‘데뷔’라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전제돼 있었는데, 드디어 그 기회를 잡은 것이다. <펭수의 걸그룹 도전기> 에피소드는 도전의 서사구조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영상 중 하나다.
<펭수의 걸그룹 도전기>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은 서사구조를 따른다.
1) (야외) 오디션장으로 향하는 펭수
2) (오디션장) 심사위원 3인 소개와 펭수의 인사
3) (오디션장) 심사위원의 질문과 펭수의 답변
4) (오디션장) 오디션 진행 : 노래, 춤 1, 춤 2, 포즈와 표정 순서로 진행
5) (오디션장) 펭수가 나가고 심사위원들 간 의견 교환
6) (오디션장) 심사위원들의 중간결과 통보: 걸그룹과 2시간 동안 연습 통지
7) (연습장) 걸그룹 S.I.S와 펭수와의 만남, 인사
8) (연습장) 걸그룹 S.I.S가 인사법, 노래, 목 풀기, 춤에 대해 펭수에게 알려줌
9) (연습장) 연습을 마치고 심사위원들이 들어와 재평가
10) (연습장) 심사위원 3인과 걸그룹 S.I.S 앞에서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펭수
11) (연습장) 심사위원들의 평가, 정식으로 데뷔하기에는 어렵다는 결과 통보
이 에피소드에서는 펭수에게 걸그룹 오디션에 도전하라는 미션이 주어지고, 펭수가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펭수에게 경쟁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도전의 서사구조를 사용하는 콘텐츠는 감정 이입할만한 주인공을 내세우고, 주인공 주변에 경쟁자를 배치함으로써 몰입감을 높이게 마련이다. 오디션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그렇다. 참가자들을 경쟁구도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오디션 참가자와 심사위원들 간에도 미묘한 갈등관계를 조성해 긴장감을 높이기도 한다. 이러한 긴장과 갈등 속에서 시청자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참가자에게 감정 이입하게 되고 이들을 통해 마치 자신이 미션을 수행한 듯한 대리만족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자이언트 펭TV>의 오디션 에피소드에서는 생존과 탈락이라는 경계선이 존재하긴 하지만, 긴장감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탈락이라는 최종 결과에도 웃음을 유발한다. 실제 오디션처럼 심사위원들이 지원자(펭수)에게 춤과 노래, 자신 있는 포즈 등을 요청하고 펭수는 이를 수행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생존과 탈락이라는 이항대립구조는 전혀 작동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도전의 서사구조를 차용하고 있지만, 경쟁구도를 내세우지 않는 이러한 요소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해하다”, “편안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자이언트 펭TV>는 단순히 펭수의 귀여운 외모와 시원한 입담만을 앞세워 인기를 끈 것이 아니다. <자이언트 펭TV>는 쉽고 특징적인 세계관을 설정한 뒤, 도전의 서사구조를 변용하여 사람들에게 소구하는 새로운 인기 콘텐츠를 만들어냈다. 만약 직접 콘텐츠를 제작하려 하거나, 기존의 콘텐츠를 통해 마케팅 측면에서 활용하고자 한다면 어떠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그 세계관을 강화해 나가는지가 중요하다.
<자이언트 펭TV>는 에피소드가 누적되며 충분히 스토리텔링이 되고 있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펭수에게 마케팅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 용이하다.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팬덤이 있기에 광고에 대한 거부감도 적다. 영화 <백두산>을 홍보한 영상을 비롯해 <파자마 어워드>(스파오), <마트 지옥>(이마트), <펭력사무소 편의점>(GS25) 등의 영상은 광고임에도 모두 200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기업들이 탐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콘텐츠는 제작 주체의 의도에 따라 현실을 재구성한다. 안정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출연자의 체험을 공유하며 현실성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콘텐츠 제작의 주요 기법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투영하게 만들어야 한다. <자이언트 펭TV> 시청자들은 펭수가 도전과 경쟁의 과정을 거치며 성공하는 모습을 볼 때 대리만족을 느끼고, 실패했을 대는 동정함으로써 감정 이입한다. 자기 자신을 개입시켜 얻는 즐거움이 있다. <자이언트 펭TV>는 도전의 서사구조를 차용하면서도, 경쟁 요소는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갈등과 긴장을 없앴다. 뚜렷한 세계관을 설정한 뒤, 도전의 서사구조를 활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콘텐츠를 만들어냈다.
젊은 층들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꼰대’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나 때는 말이야”로 대변되는 ‘꼰대’들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자이언트 펭TV>는 이러한 ‘안티 꼰대’ 정신을 정면으로 수용한다. ‘할 말은 하는’ 캐릭터인 펭수는 꼰대들에게 전면으로 대응하고, 제작진은 이러한 캐릭터를 활용해 갑과 을의 관계가 바뀐 상황을 설정해 재현한다.
‘안티 꼰대’ 정신을 내세운 방송 프로그램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현재 방송 중인 KBS 2TV의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는 사장과 직원이 갈등하는 모습을 리얼리티 형식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꼰대’ 같은 사장의 모습을 비추지만, 이를 ‘비판적으로’ 고찰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장님들이 ‘꼰대’ 같은 행동을 할 때마다 진행자들이 인상을 찌푸리지만, 결국에는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장의 입장을 옹호하는 식으로 프로그램이 흘러간다. 오히려 이런 프로그램들은 강자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할 우려가 있다.
<자이언트 펭TV>는 이러한 프로그램과 반대로, ‘안티 꼰대’ 정신을 오롯이 드러낸다. 일례로 펭수가 EBS 연습생이 되기 위해 오디션을 보는 <EBS 최초 연습생 펭수의 오디션 합격 TIP> 에피소드가 있다.
이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은 서사구조를 따른다.
1) (EBS 내부) 펭수 입장, 심사위원들(제작진)에게 인사 및 자기소개
2) (EBS 내부) 심사위원들과의 대화
3) (EBS 내부) 오디션 시작: 펭수의 노래(요들송)
4) (EBS 내부) 박재영 매니저의 등장과 퇴장
5) (EBS 내부) 오디션 지속: 펭수의 랩, 춤
6) (EBS 내부) 결과 발표
서사구조 중 6번째의 결과 발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래 오디션을 주제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에서는 선택이 이루어지는 단계에서 심사위원들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택을 했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 또, 지원자에게 호감 표시를 하고, 지원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선택을 한 심사위원들 간에 합일 관계가 있어야 한다. 보통 이 과정에서 ‘꼰대’가 나타난다. 평가하는 자(갑)와 평가받는 자(을) 사이의 권력 불균형을 이용해 을을 착취하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탄다.
그런데 <자이언트 펭TV>는 다르다. 심사위원이 “회의를 해보고 결과를 나중에 알려드린다”는 말을 하는 순간, 펭수는 말을 끊어버리며 “여기서 하세요. 빨리 해주셔야지 저도 KBS를 가든 MBC를 가든 해야 됩니다. 하나 둘 셋!”이라고 일갈한다.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사실 취업은 내가 뽑히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내가 일할 회사를 고르는 과정이기도 하다. 펭수는 이 같은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심사위원에게 소리치며 갑질에 지친 우리를 위로한다.
펭수의 ‘안티 꼰대’ 정신은 실제 상황에서 ‘꼰대’를 마주쳤을 때 빛을 발한다. 펭수가 EBS <보니하니> 생방송에 출연하는 영상이 있다. 생방송 시작 전, 펭수가 <보니하니> 분장실에 들어가자 진행자 최영수는 “야, 함부로 들어오면 어떡해?”라고 면박을 준다. 그러자 펭수는 바로 “아, 안녕 영수”라고 반말로 맞대응을 한다. 자막은 ‘보니하니 6년 차 영수 vs. 1일 차 펭수’라고 뜬다. 아무리 선배일지라도 초면에 반말을 하는 ‘꼰대’에게는 강하게 대응한 것이다. 실제로 해당 진행자는 폭행 논란으로 하차했다.
펭수가 제작진을 ‘매니저’라고 부르는 것도 ‘안티 꼰대’ 정신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꼰대는 상대방과 내가 수평적인 관계가 아닌, 자신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펭수는 그동안 방송계 전반의 갑질 문화를 비판하듯 제작진과 출연자 사이의 권력구도 자체를 일시에 차단하며 수평적인 관계를 내세운다.
6번째 에피소드인 <벚꽃놀이> 영상이 그 예다. 펭수는 이 영상에서 제작진의 말을 끊은 채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여기서 ‘무시’라는 자막이 사용된다. 펭수는 또 “똑바로 합시다, 진짜”와 같은 언술을 통해 제작진과 출연자가 수평적 관계임을 보여준다. 펭수가 제작진을 ‘매니저’로 지칭하는 방식을 통해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지향하는 펭수의 캐릭터가 구축된다.
EBS는 이러한 펭수의 캐릭터를 활용해 갑과 을의 관계가 바뀐 상황을 설정해 에피소드로 만들기도 했다. <오늘은 대가 대빵> 에피소드에서는 펭수가 1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활동한다. 펭수는 보고를 하는 보건복지부 간부에게 “짧고 굵게 말씀해 주세요”라고 쏘아붙이거나, “펭빠”라고 해야 하는 상황에서 “펭하”라고 하는 간부에게 화를 낸다. 구독자들은 “진짜 펭수가 간이 크긴 하다. 높은 사람 앞에서 기가 안 죽음”, “와, 저 회의 자리에 계신 분들 직원들한테는 엄청 높은 고위 공무원들일 텐데, 막 대하는 거 넘나 꿀잼이야”와 같은 댓글을 달며 펭수의 이러한 모습에 환호한다.
<자이언트 펭TV>는 이처럼 펭수 캐릭터를 이용해 ‘안티 꼰대’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했으며, 이렇게 시대정신을 충실히 반영함으로써 문화를 선도하고 ‘대세’로 떠오르게 되었다.
자존감이 화두로 떠오른 시대에 <자이언트 펭TV>는 펭수라는 캐릭터를 통해 자존감 이슈를 전면적으로 내세운다. ‘웰빙’이나 ‘힐링’과 같은 이슈가 한 시대를 지배하던 때가 있었다면, 지금은 ‘자존감’이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자존감이라는 표현은 19세기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지만, 한국에서는 정신과 전문의가 쓴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이 2016년 출간된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자존감이 하나의 시대정신이 된 것은 현재 우리 사회가 남들과의 비교와 경쟁을 극단적으로 부추기는 환경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분위기 속에서 개인은 역설적으로 자존감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자존감이 현대인의 내면을 관통하는 중요 키워드가 된 것이다.
자존감(self-esteem)은 자아존중감을 뜻하는 말로,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 간단하게 말해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다양한 방면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자존감의 핵심은 ‘나의 기준‘에 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남의 기준이 아닌, 자기 자신의 기준에 따라 움직이며,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된다. 자존심이나 자만심과는 다른 의미로, ‘자기다움’을 찾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주요 방법이다.
<자이언트 펭TV>는 펭수를 자존감이 높은 캐릭터로 설정하고, 영상 곳곳에서 이러한 캐릭터를 표출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제작진은 수용자를 펭수에게 감정 이입하도록 만드는데, 수용자들은 자존감 높은 펭수가 행동하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일종의 위로를 받는다. <자이언트 펭TV>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펭수, 학교 가다!> 편에서부터 자존감 이슈는 두드러진다. 이 에피소드의 도입부는 <자이언트 펭TV>의 타이틀곡으로 시작하는데, 타이틀곡의 소개가 끝나면 “이것은 전설의 시작”이라는 자막이 전체 화면을 채운다. 이 자막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자이언트 펭TV>는 <EBS 아이돌 육상대회> 에피소드 방영(2019년 9월 19일)을 기점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첫 에피소드가 방영된 것은 4월 3일로, <EBS 아이돌 육상대회>가 방영된 시점과는 약 5개월의 시차가 있다. 그런데 구독자가 10명 이내였던 펭수는 첫 에피소드부터 스스로 “전설”이라고 표현하고, “뽀로로를 넘어 BTS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처음부터 ‘월클(월드 클래스의 줄임말로, 특정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사람을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을 꿈꾼 것이다. 자신이 큰 인기를 끌 것을 미리 알고 있는 듯한 이 자막(“이것은 전설의 시작”)은 구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해당 에피소드에 달린 “자기 입으로 전설의 시작이래, 뻔뻔한 거봐. 1화부터. 진짜 좋아”라는 댓글이 이를 말해준다.
펭수는 남의 기준과 상관없이 자기만의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첫 에피소드를 촬영할 당시 펭수는 유명한 캐릭터가 아니었기 때문에 펭수를 잘 모르는 아이들은 펭수에게 잘 호응해주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펭수는 제작진과의 개인 인터뷰를 통해 “조금… 싸했어요”라는 분위기를 감지하면서도 “펭귄이 너무 랩을 잘해서 놀란 거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대화 구조에서 살펴볼 개념은 바로 ‘메타인지’로, 메타인지는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자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대체적으로 메타인지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펭수는 촬영을 하면서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감지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스스로 평가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자기 자신이 만든 기준에 따라 삶을 살아갈 때 창의적이 되며, 자기 신뢰감이 높아진다. 펭수는 이처럼 건강한 자존감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치유를 선사한다.
이밖에도 펭수라는 캐릭터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들을 알려준다. <펭수의 얼어 죽을 고민상담소> 영상에서는 펭수가 구독자들의 고민 신청을 받아 상담해준다. “나는 달리기가 좀 느려서 다른 반 애들이 놀려서 고민이야”라는 고민에 펭수는 자존감과 관련해 중요한 언급을 한다. 그는 “다 잘할 순 없어요. 펭수도 달리기는 조금 느립니다. 그래도 하나 잘 못한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잘하는 게 분명 있을 겁니다. 그걸 더 잘하면 돼요”라고 답한다.
내 기준이 아닌 남의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초라해지게 마련이다. “나는 나를 가장 존경한다”, “내가 나일 때 제일 좋은 거다”, “이상형은 나 자신”이라고 말하는 펭수는 자기 자신에게 기준을 두라고 강조한다.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오! 여기 잘생긴 친구가 있네요?“라며 ‘셀프 칭찬’을 하기도 한다. 펭수 캐릭터의 이 같은 행동들은 자존감에 있어 하나의 지침이 되며, 이를 적절하게 활용한 <자이언트 펭TV>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영어사전 <메리엄 웹스터>는 3인칭 복수 대명사 ‘그들(They)’에 “성 정체성이 여성이나 남성이 아닌 개인”이라는 새로운 뜻을 보탠 바 있다. 그(he) 또는 그녀(she)에 속하지 않는 개인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는 ‘mankind’를 ‘humankind’로, ‘chairman’을 ‘chairperson’으로 바꾸는 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자이언트 펭TV>는 주인공 캐릭터를 ‘They’, 즉 성 중립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자이언트 펭TV>는 암수 구별이 어려운 펭귄의 특성을 이용해 펭수의 성별을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고정된 성 역할을 전복한다. 이러한 성 중립성(Gender Neutrality) 설정은 양성평등이라는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다.
성 중립성이란, 고정된 남녀 성 역할을 전복하는 것을 너머 아예 성별, 성차 자체를 없애버리는 개념으로, ‘젠더리스(genderless)’와 유사하다. 크리에이터로 성장하고자 하는 펭수의 모습을 그리는 프로그램에서 주인공이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프로그램을 연출한 이슬예나 PD는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펭수가 다양한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콘텐츠의 핵심인데 여기에서 ‘펭수가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먼저, <자이언트 펭TV>의 성 중립적 요소는 펭수의 의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남성 연기자가 펭수를 연기하지만, 입고 나오는 의상은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다. 가장 많이 회자된 의상은 타 방송국 시상식에 참석했을 때 입은 하얀색 드레스다. 비슷한 의상으로는 고양예고 무용과에 방문했을 당시 입은 분홍색 발레복이 있다. 전통적으로 여성성이 강조된 의상들이다. 헤드셋 대신 머리핀을 꽂고 나오는 때도 있다. 한복 의상은 두 번 선보였는데, 한 번은 여성 한복을, 한 번은 남성 한복을 입었다.
남성 의상인지 여성 의상인지 특정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해당 에피소드의 내용에 맞게 표현한 의상들은 대체로 ‘젠더리스(genderless)’한 스타일이며, 이러한 의상 표현이 반복될수록 사람들은 성 중립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제작진은 펭수 캐릭터를 성 중립적으로 설정했지만, 정부부처 등 다른 주체들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펭수의 설정이 침해받는 모습도 나타났다. 보건복지부와 함께 촬영한 영상에서 복지부 담당자는 펭수에게 가족사진을 선물한다. 그런데 그 가족사진 속 펭수는 남성으로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사진 속 펭귄들은 사회에서 정상가족이라고 간주되는 4인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턱수염이 난 아빠 펭귄과 양갈래 머리를 하고 앞머리를 내린 엄마 펭귄, 그리고 펭수의 여동생이 있었다. 펭수는 선물을 줘서 고맙다는 말 대신, “저 동생 없는데요?”라고 받아친다. 이 같은 표현방식은 미디어가 오랫동안 재현해온 고정된 성 역할에 일침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성평등을 기치로 젠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때에 캐릭터의 성별을 특정하지 않고 성 역할을 고정하지 않은 것은 <자이언트 펭TV>가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다. 실제로 <자이언트 펭TV> 측은 펭수가 남성인지 여성인지에 대해 밝힌 바 없으며, 이와 같은 태도는 성 역할 모델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타인을 존중해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2020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WEF)의 가장 큰 이슈는 ‘경제’가 아닌 ‘환경’이었다. 다양한 경제 이슈를 제치고 ‘기후 위기(Climate Crisis)’가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것이다. 스웨덴의 10대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 같은 인물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미래 세대에게 기후 변화 이슈는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로 지목받고 있다.
<자이언트 펭TV>는 펭수 캐릭터를 활용하여 기후 위기 같은 이슈를 적극적으로 부각함으로써 현재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직접적으로 환경 이슈를 다룬 에피소드는 극지연구소 이원영 연구원과 함께 출연한 <펭수 VS 뽀로로> 편이다. 해당 편에는 EBS의 다른 펭귄 캐릭터인 뽀로로도 함께 출연했다.
이 에피소드의 서사구조는 다음과 같다.
1) (극지연구소 상황실) 펭수와 뽀로로, 극지연구소 종합상황실 방문하여 이원영 연구원과 인사
2) (극지연구소 상황실) 장보고 과학기지 화면을 보고 자기 고향이라며 울음 터진 펭수
3) (극지연구소 로비) 이원영 연구원의 펭귄 모형 소개, 펭귄의 종류 설명
4) (전화 연결 화면) 제작진이 뽀로로 소속사 홍보팀에 뽀로로가 펭귄이 맞느냐고 문의
5) (극지연구소 운동장) 펭수 VS 뽀로로의 펭귄력 테스트 1~3
6) (극지연구소 운동장) 이원영 연구원이 ‘펭귄의 날’을 설명하고 펭수와 뽀로로를 ‘펭귄 수호대’로 임명
7) (극지연구소 입구) 펭수와 뽀로로 헤어짐
8) (버스 안) 펭귄 수호대 활동일지 1: 대중교통 이용 촉구
9) (한강) 펭귄 수호대 활동일지 2: 자전거 이용 촉구
10) (EBS 사내 카페) 펭귄 수호대 활동일지 3: 텀블러 사용 촉구
이 에피소드는 4월 25일 ‘펭귄의 날’을 맞아 4월 24일 업로드된 영상이다. 펭귄 박사 이원영 연구원은 이 영상에서 펭귄의 날은 아델리 펭귄이 남극에서 이동을 시작하는 시기에 맞춰 지정된 날이며, 지구온난화 때문에 서식지를 잃어가는 펭귄을 하루라도 더 생각하자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펭수와 뽀로로가 함께하는 ‘펭귄력 테스트’는 펭귄의 3가지 특성으로 승부를 가리며, 더 펭귄다운 자가 승리하는 게임이다. 위의 서사구조에 따라 이 에피소드에서는 펭귄의 서식지인 남극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며, 실질적으로 지구 온난화를 늦출 수 있는 일상의 방법들을 소개한다.
펭수가 ‘북극곰’과 함께 출연한 <펭귄이랑 북극곰이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에피소드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 북극곰을 “먼 친척 사이”로 소개한 펭수는 “요즘 얼음이 녹아서 살 곳이 없다고 들었다”라고 말하며 “우리 열심히 잘해서 지구를 오염시키지 말자”라고 제안한다. 북극곰은 “눈이 녹지 않게 해 달라”라고 호소하기도 한다. 해당 영상에는 “제발 ‘나 하난데 뭐 어때’가 아니라 ‘나 하나라도 해야지’라는 마인드를 가집시다, 여러분”이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또, “북극 빙하 녹는 게 심각하긴 한가 보네, 북극곰이 빠짝 말랐잖아”라는 댓글에는 펭수가 직접 “노력하자”라고 댓글을 달기도 했다.
펭수가 최근 한 섬유유연제 모델로 발탁된 것은 펭수가 프로그램을 통해 기후 변화 이슈를 지속적으로 부각한 것과 잇닿아 있다. 일반적인 섬유유연제에는 향기캡슐을 넣는데, 향기캡슐은 미세 플라스틱의 일종이다. 미세 플라스틱은 헹굼 과정에서 상당수 하수로 유입돼 하천과 바다를 오염시킨다. 반면 펭수가 광고하는 섬유유연제는 생태계를 교란하는 향기캡슐을 넣지 않고도 은은한 향이 오래 유지되도록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자이언트 펭TV>는 프로그램을 통해 쌓은 이미지를 광고로도 활용함으로써 환경문제와 동물 보호에 관심을 갖고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세대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자이언트 펭TV>의 또 다른 성공 요인 중 하나는 현재 청년세대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가치인 ‘공정성’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이다.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제기된 자녀의 입시 비리 의혹 사건이나, 가요계의 음원 사재기 논란 등을 살펴보면,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자이언트 펭TV>는 이처럼 공정성의 가치가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분위기 속에서 공정성이란 무엇인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공정성의 화두를 던진 첫 에피소드는 <EBS 아이돌 육상대회>였다. 이는 명절 특집 프로그램인 <아이돌스타 선수권대회>를 패러디한 것으로, EBS 캐릭터들이 체육대회를 하는 모습을 그렸다. 참석한 EBS 캐릭터로는 '비인간팀'에 뚝딱이, 뽀로로, 뿡뿡이, 펭수가 있었고, '인간팀'에 번개맨, 짜잔형, 보니하니의 먹니와 당당이가 있었다. 달리기 종목에서 비인간팀이 승리하자 펭수는 “펭귄이 어떻게 달리기로 인간을 이기느냐”며 “이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항의한다. 펭수는 이어 규칙 개정까지 요구한다. <자이언트 펭TV>는 ‘EBS 아이돌 육상대회’ 에피소드 방영 직후 급격하게 구독자수가 늘었는데, 이러한 펭수의 모습이 공정성에 민감한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자이언트 펭TV>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프로그램 외적으로도 다양한 이슈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는 정부부처의 펭수 표절 의혹이다. 해당 이슈는 공정성 측면에서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인사혁신처는 공식 유튜브 계정 ‘인사처TV’에서 ‘B공식 캐릭터의 탄생 도와주세요 선배님’이라는 영상을 통해 펭수를 표절한 ‘펑수’를 선보였다. 펑수는 “제2의 펭수를 꿈꾸고 있으며 스위스 요들학교에서 요들송을 유학하다가 온 남극 출신 후배”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고양시청 또한 공식 마스코트인 고양고양의 얼굴에 펭수의 눈과 입을 붙인 괭수를 선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만든 쪽은 패러디라고 주장했으나, 저작권 침해 논란이 불거졌다. 저작권 보호에 앞장서야 할 국가기관이 이를 어긴 데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이 논란에 대해 <자이언트 펭TV> 제작진이 보인 대처가 돋보였다. 78번째 에피소드인 <파자마 어워드>에서 이 캐릭터들을 초청한 것이다. 제작진은 ‘껌딱지상’ 부문을 만들어 펑수, 괭수, 새령이에게 공동수상 했다. 새령이는 법제처 마스코트로, 그동안 펭수 관련한 영상을 업로드해왔다.
공동 수상을 한 이유에 대해 펭수는 “세 분 다 저를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같기 때문에 사랑의 크고 작음을 판단할 수 없다”라며 논란을 일축한다. 이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면, “와 어쩜 이렇게 논란을 지혜롭게 다룰 수 있지? 캐릭터 유사성 논란을 껌딱지상으로 끌어안는 EBS 클라스”, “펑수랑 괭수 욕 진짜 많이 먹었는데 그런 그들까지 품는 펭수와 제작진분들 최고” 등이 있었다. 두 댓글 모두 1천4백여 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공정성 논란에 현명하게 대처한 <자이언트 펭TV> 측에 칭찬이 쏟아졌다.
광고 분야 용어 중 세렌디피티(Serendipity)란 개념이 있다. 세렌디피티는 내가 원하던 것을 행운처럼 뜻밖에 만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소비자들에게 흥미와 즐거움을 유발하고 긍정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광고를 세렌디피티 광고라 한다. 광고 제작자들에게는 이처럼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세렌디피티 광고를 제작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기대 위반 이론(violation of expectancy)은 세렌디피티적인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핵심 이론이다. 커뮤니케이션 연구자인 주디 버군(Judee Burgoon)은 이 이론에서 기대나 예상에 대한 위반이 종종 긍정적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세렌디피티적인 아이디어가 사람들에게 인사이트를 줘 주의를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어떤 콘텐츠를 보고 행복한 발견을 했다고 느끼게 하려면 기대 위반 이론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생각 틀을 깨뜨릴만한 인사이트를 주면서 정보성과 유희성을 함께 담아낼 때 긍정적인 기대 위반이 일어난다. 기대 위반을 주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반전 매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반전 매력이란, 평소에는 보여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서 발생하는 매력 포인트로, 일반화가 깨지는데서 오는 심리적 현상을 말한다. 대중문화의 캐릭터 설정에서 폭넓게 발견된다. 쉽게 말해,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착한 캐릭터’보다는 ‘나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착한 캐릭터’에 끌린다는 것이다. ‘츤데레’라는 말은 반전 매력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다. 츤데레는 좋아하는 상대가 있을 때 제삼자 앞에서는 퉁명스럽게 대하지만,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반전 매력을 활용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외형적인 측면이나 성격적인 측면으로 반전 매력을 설정할 수 있다. 먼저 외형적인 측면에서는 거대한 덩치의 캐릭터가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거나, 미남형의 캐릭터가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성격적인 측면에서는 싸움에 탁월한 캐릭터가 때때로 섬세한 면을 보인다든지, 소심한데 알고 보니 영웅이었다든지 하는 모습들이 있을 수 있다. 애니메이션 ‘원피스’는 반전 매력 요소를 잘 활용한 예시로 볼 수 있다. 평상시 밝은 모습의 루피가 진지해지는 포인트에서 사람들은 루피에게 감정 이입을 한다.
그런데 캐릭터에 반전 매력을 주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캐릭터의 행동에 큰 변화가 있을 경우 자칫 설정 오류나 캐릭터 붕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반전에 해당하는 모습을 너무 남발하면 그 자체가 캐릭터가 되어 매력이 사라지기도 한다.
<자이언트 펭TV>는 그 자체로 반전 매력을 가지고 있다. 교육방송 EBS가 기획한 콘텐츠라는 점이 그것이다. 펭수의 좌충우돌하는 모습과 그동안 쌓아온 EBS의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특별한 매력을 준다. B급 문화를 차용했음에도 A급 퀄리티로 만들어낸 점, 10살 펭귄이 동년배 코드를 알고 있다는 점 등도 <자이언트 펭TV>의 반전 매력이다.
한 번 가정해보자. 만약 펭수가 EBS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인기가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평소의 EBS 이미지와 다른 반전 모습 때문에 펭수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가 알던 EBS는 공익적이고, 교육적이며, 교훈적이다. ‘교육 방송’, ‘수능 방송’, ‘재미없는 방송’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자이언트 펭TV> 에피소드들은 기존의 EBS와는 다른 차원의 것들을 보여준다. 먼저 일부러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으려 하지 않는다. 연출자인 이슬예나 PD의 말처럼, 가르치려들지 않는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기획의도가 잘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을 너머 특별한 예능감으로 재미까지 선사한다. 유튜브 댓글에는 “배운 놈들이 각 잡고 유튜브 찍으면 이렇게 된다”, “EBS가 교육방송이 아니라 다른 곳들 뺨치는 예능력이 있다”, “아니 대체 EBS야 tvN이야”와 같은 내용이 달린다.
<자이언트 펭TV>의 제작 주체들이 반전 매력을 보여준 에피소드를 꼽으라면, EBS 이동현 기자가 출연한 <펭수가 알고 싶다>와 김보민 성우가 출연한 <펭수 × 쓰복만>이 있다. 먼저 <펭수가 알고 싶다> 영상은 앞서 서사구조를 살펴보았듯이, 펭수가 사람이 아닌 펭귄임을 증명하려는 내용이다. 영상에 달린 댓글 중 약 2만 1천여 개의 ‘좋아요’를 받은 댓글은 다음과 같다. “더 신기한 건 김상중 성대모사하시는 분이 배우가 아니라 EBS 기자분이시라는 것. EBS 이렇게 끼 넘치는 인재로 넘쳤는데 다들 어떻게 참았냐.” 다른 댓글들에서도 이동현 기자의 연기력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3천6백여 개의 ‘좋아요’를 받은 댓글은 “하다 하다 기자님이 연기하는 건 첨 봤네. EBS 겁나 웃기네”이다. “연기자가 아니라 기자라고? 펭수가 펭귄인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다”, “얼굴은 딱 기자 같은데 진지하게 성대모사하니까 더 신선하네”와 같은 댓글들도 있었다.
김보민 성우가 출연한 <펭수 × 쓰복만> 에피소드도 제작 주체에 대한 반전 매력이 도드라진 영상이었다. 해당 에피소드(1,2편)의 서사구조는 다음과 같다.
1) (EBS 내부) 펭수가 나와 오늘의 직업 체험 소개
2) (EBS 더빙실) EBS 소속 김보민 성우와 펭수의 만남
3) (EBS 옥상) 김보민 성우와 펭수가 함께 연기력을 키우기 위해 ‘오렌지 게임’ 수행
4) (EBS 옥상) 연기력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자아 꺼내기’ 수행
5) (EBS 옥상) 박재영 매니저의 도움으로 아바타와 상황을 랜덤으로 만들고, ‘캐릭터 상황극’ 수행
6) (EBS 옥상) 김보민 성우와 펭수의 발성 훈련
7) (EBS 내부) 김보민 성우와 펭수가 함께 데시벨 측정
8) (EBS 내부) ‘한 번도 안 틀리고 누구도 부르기 어려운 노래’ 연습
9) (EBS 더빙실) EBS <플라워링 하트> 애니메이션 더빙 연습
먼저 김보민 성우는 유튜브에서 드라마 <SKY 캐슬>의 배우들을 성대모사하는 영상을 올려 유명세를 탄 크리에이터다. 스스로 ‘관종’으로 칭하는 그에게 ‘EBS다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이 에피소드는 많은 사람들에게 EBS의 반전 매력을 선사했다. 김보민 성우가 EBS 소속이라는 것을 몰랐던 사람들이 많아 이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한 댓글들이 많았다.
‘미대’를 나왔다고 알려진 박재영 PD의 그림 실력도 화제가 됐다. 위의 서사구조 중 다섯 번째 서사에 캐릭터 상황극을 하기 위한 준비로 캐릭터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박재영 PD는 만화가 이말년이 출연한 에피소드에서도 그림 실력을 뽐낸 적이 있는데, 다재다능함을 보여주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밖에도 81번째 에피소드인 <펭수 밴드 도전기 feat. 노브레인> 편에서도 반전 매력이 있었다. 해당 에피소드의 서사구조는 EBS의 반전 매력을 돋보일 수 있게 구성되었다.
1) (EBS 내부) 드럼을 배우고자 하는 펭수
2) (EBS 내부) 펭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연습실을 찾은 의문의 남자가 드럼을 연주
3) (EBS 내부) 소리를 듣고 펭수가 연습실로 돌아오자, 드럼 스틱 한 짝만 남겨져 있음
4) (EBS 복도) ‘랄랄라 뿌우(자동차 모형)’를 닦고 있는 한 남자가 등장
5) (EBS 복도) 펭수가 차 안에서 드럼 스틱 한 짝을 발견, <랄랄라 뿌> 프로그램의 음악감독 황현성 소개
6) (EBS 복도) 황현성 감독에게 밴드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펭수
7) (서울 망원동 밴드 연습실) 노브레인을 소개해준 황현성 음악감독
8) (서울 망원동 밴드 연습실) 노브레인을 어떻게 알았냐는 펭수의 질문에 황현성 음악감독은 자신이 노브레인 멤버라고 답함
이처럼 EBS 음악 프로그램의 음악감독이 노브레인의 멤버이자 드러머였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4천3백여 개의 ‘좋아요’를 받은 댓글은 “EBS 음악프로의 음악감독님이 노브레인 드러머였다는 게 놀라운 부분 아니냐”라고 했고, 비슷한 수의 좋아요를 받은 또 다른 댓글은 “노브레인 드러머가 EBS 음악감독이었던 것부터 쇼킹”이라고 표현했다. 이와 같은 반전 매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과 더불어 이를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서사구조를 만든 것이다.
이 외에도 전원배 매니저 등 조연출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전원배 매니저는 <자이언트 펭TV>의 조연출로 일하다 퇴사를 했는데, 퇴사를 한 이후 ‘연출’ 파트가 아닌 ‘출연’ 파트에서 활약 중이다. 그는 68번째 에피소드인 <새 연습생 합류?> 에피소드에서 ‘자이원배’라는 이름으로 EBS 연습생에 도전한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자이언트 펭TV>에 출연함으로써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게 EBS라는 틀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자신만의 끼를 분출하는 <자이언트 펭TV> 제작 주체들에게 많은 호응이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자이언트 펭TV>가 반전 매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다.
“쓸데없이 고퀄리티”는 인터넷 용어로, 단순한 유머 범주인데 너무 공들였다는 뜻으로 쓰인다. B급 코드를 콘셉트로 잡았음에도 결코 질이 낮지 않은 콘텐츠를 부르는 말이다. B급 코드는 1930년대 미국의 저예산 영화를 의미하는 B급 영화에서 유래한 말로, 저예산, 비주류 문화를 통칭하는 뜻으로 쓰인다. 세련되지 못하고 싸구려 같다는 의미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감동보다는 재미를 선호하고, 주류보다는 비주류를, 다수보다는 소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A급 문화와 차이를 보인다. B급 코드와 A급 퀄리티 사이의 간격이 웃음을 유발하는 기제가 된다.
미국 만화가 루브 골드버그가 고안한 ‘골드버그 장치’가 그 예다. 이 장치는 수행하는 일은 아주 단순하면서 매우 비효율적인 단계를 거치도록 설계돼 있어 “쓸데없이 고퀄리티”한 사례로 불린다. 대중가수인 그룹 ‘노라조’도 비슷한 범주다. 특유의 ‘병맛’ 콘셉트로 인해 저평가되지만, 가창력이 매우 뛰어난 가수 중 하나다. 방송 프로그램 중에서는 MBC <무한도전>과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들 수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다른 방송 프로그램들과 달리 황당함과 재미, 호기심을 유발하도록 기획되었는데, 지상파 방송 특유의 높은 완성도로 프로그램을 제작해 높은 시청률을 확보했다.
<자이언트 펭TV> 또한 ‘쓸데없이 고퀄리티’한 측면이 있다. <자이언트 펭TV>는 영화나 드라마와 같이 높은 제작비가 투입되는 프로그램이 아님에도 지상파 방송국 특유의 안정된 편집과 연출이 돋보인다. 펭수가 B급 문화를 차용하여 인기를 끌었다는 분석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이보다는 B급 문화의 요소를 가져와 A급 퀄리티로 만들어낸 반전 요소가 콘텐츠 성공 요인이다. “이게 공중파 클라스다. 종편이나 유튜브는 범접 못하는 각본이다”, “진짜 확실히 영상 뽑아내는 퀄이 ㅎㄷㄷ 하네요”와 같은 반응이 이를 말해준다.
<자이언트 펭TV>의 영상 대부분이 탄탄한 서사구조와 안정적인 편집을 보여주고 있고, 일반인이 만든 유튜브 콘텐츠와 차별화된 지점이 발견된다.
주목받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 기능적으로는 누구나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겠지만, 사회의 문화를 선도하고 하나의 장르로까지 자리매김하려면 정신적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2020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양극화’라는 현재의 시대적 맥락을 잘 풀어냈기 때문이다. 이처럼 콘텐츠 제작자는 특정한 시대적 맥락을 제대로 읽는 것이 필요하며,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못하면 그 콘텐츠는 시대착오적이 되어 동시대 사람들에게 외면받는다.
<자이언트 펭TV>는 현재의 사회적 시대상과 보편적 가치에 주목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현재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다. <자이언트 펭TV>가 담고 있는 시대정신으로는 ‘안티 꼰대’ 정신, 자존감, 성 중립성 설정, 기후 변화 이슈 부각, 공정성 등이 있다. 지금은 윤리적 소비가 화두가 된 시대다. 이제 개인은 나의 소비 습관이 우리 사회는 물론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한다. 갑질을 일삼는 기업을 향해서는 불매운동을 하고, 기후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는 기업의 상품은 사지 않는다. ‘가성비’보다는 ‘가심비’를 중요하게 따지며, 나를 위한 소비를 한다. 조금은 수고스럽더라도 가치 있는 소비를 하는 것이다.
펭수가 여러 기업들과 협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자이언트 펭TV>는 현재 사람들의 소비 패턴과 결을 같이 한다. <자이언트 펭TV>는 시대정신을 적절하게 반영함으로써 윤리적 소비자를 확보한다. 현재 소비자들이 원하는 과녁을 정확히 맞힌다. <자이언트 펭TV>는 유행이나 트렌드도 적절하게 반영하지만, 그보다는 더 큰 관점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유지되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논란 없이 지속 가능한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은 시대정신을 얼마만큼 반영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얻으며 팬덤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이언트 펭TV>처럼 현재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