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2002년 월드컵
언더독을 가장한 붉은 호랑이의 반란이 강호를 잠재운다.
이미 은퇴한 두 개의 심장을 가진 플레이어
지성 박이 포르투갈 골키퍼의 가랑이 찢어버리고
골 세리머니를 할 때 알몸으로 경기장 뛰어들어
깽판을 치는 저 사내는 대체 누구인가?
그때 난
경기도 수원 영통의 K 대학 컴공 졸
학점은 간신히 3.0에 토익 600 대 턱걸이
변변치 않은 밑바닥 스펙이 담긴 이력서
허공에 뿌리고 면접판에 얼굴을 기웃거리는
듣보잡 취준생 구직 6개월 차
여전히 첫 출근은 잡히지 않을 미래
깔끔히 마음 비우고 자기 연구방 오라 하던
동아리 지도 교수에게 의탁할까 고민하던 차
하루는 역삼 테헤란로 한복판에서 날 불러
면접 드레스 코드는 찢어진 청바지에 체크 셔츠
기깔난 나이키 에어포스 올백 차림으로
하늘의 꽁무니 찌를 기세로 솟은
스타타워 엘베의 올라가는 버튼 눌렀지
면접 대기실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한가로이 신문을 넘기는 남자를 봤어
그 자는 지지리 말 안 통하고 술버릇 개진상 떠는
꼴통 사원의 사수가 될 운명을
알고나 있었을까?
신생 대학 동아리 탑으로 키워낸 초대 회장을 맡아
럭셔리한 엠티를 다녀오고 주저리주저리 종알종알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고 거침없이 빨아드릴게요
어허, Where? 당신의 구석구석을 뿅 갈 때까지
이 바닥에 평생 뼈를 묻을 각오로 다닐게요
얼씨구야 좋다 뻔하디 뻔한 가식적인 말들의 향연
펼쳐진 건너편에 자리한 근엄 진지 면접관들은
보잘것없는 자신을 풀 배팅하고
뻥카를 치는 내 멘트의 몇 %를 믿었던 걸까?
암울했던 내 커리어가 드디어
운때를 제대로 탔는지
그럴싸한 플라스틱 사원증과 명함 더미를 받았고
이후 10년 동안 그쪽 바닥의 내로라하는
명함 세 자릿수와 맞교환을 했지 지금은
그 수많은 호화 인맥들 중에 내 안부를 먼저 물어온 자는
only one 뿐이야 지금 어디 계십니까?
시간 되시면 차라도 한잔 아직도 끈질기게 영업 멘트 날리는
영업 본부장으로 승진한 그에게 대박 나시라고
건승하시라고 건투하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이후 그는 긴 묵묵부답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몰라
입사 기념 첫 회식부터 식당 화장실
문 걸어 잠그고 연락두절 여친 찾아
해가 지기도 전에
테헤란로 복판에서 울고불고 깽판을 부렸다
멋모르는 신입 초짜의 매일매일은 critical의 연속
주말에도 새벽에도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긴급 전화에 메시지에
혈혈단신 대적하던 일당백의
화려한 커리어는 소소한 소동으로 시작해
거한 깽판극으로 막을 내렸다
잠시 머무른 운때가 다한 것인지
10년 후 마지막 송별 회식에서는
무명無名의 날 거두어준 캡틴에게 큰 절 올리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혀 꼬부라진 울음기 묻은 목소리로
거듭 인사드렸다 그 이후는 필름이 끊겨 통 생각이 나질 않아
첫 술자리에서 연달아 마신 폭탄주 석 잔이 치명타
회사에서 한 몸처럼 붙어 다녀
종종 사귀는 거 아니냐는 오해를 받던
절친 Y에게 내 앞에서 제발 꺼지라 악을 지르던 내가
과연 나였을까
낡은 형광등 깜박이는 상가의 복도 거울에 비친
웬 헐벗은 사내가 텅 빈 필드 가로지르며
무표정한 관중석을 향해 가운뎃손가락 들어
올리며 야유하는 마지막 세리모니가 떠오를 뿐
마주 보는 날 바라보며
대신 울어주는 거울에게 다가가 늘어진 소맷부리로
희뿌연 얼굴 닦아주었다 Since 2012
허나 내 소매는 마를 기미가 안 보여
누구는 가끔씩
머리를 밀고 306 보충대로 다시 입대하는 꿈을 꾼다는데
난 그 회사에 재입사하는 꿈을 꾸곤 해
끔찍하기도 하고 안도감도 들고 한편으로는
아직 날 받아주는구나 나 죽지 않고 살아있네
뿌듯하기도 하지 참 기특해
사각의 파티션에 갇혀 일분 내로 결제 메일 보내라는데
마우스에 손을 올리면 자꾸만 그놈이
쥐구멍으로 숨어 버리는 거야
부끄럽다고 창피하다고
꼬리를 끊고 도망가는 건 완전 오버 아니니
이제는 과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전립선이 긴장해
가장 마지막에 불이 꺼지는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허먼밀러 의자에 오래 앉아 있기도 힘들어
허물어지는 마지막을 99%
예감하고 조기 퇴역한 날 부디
험하게 굴리진 말아줘
골대를 흔들고
그물을 찢어버린
축구공을 품에 안고 지그재그로 도망치는
버킷리스트 No. 1
불혹을 넘긴 그 사내는 아직도 호시탐탐
골을 터뜨린 상대 팀 스트라이커의
세리머니 중간에 맨몸으로 경기장 뛰어들어
완전무결한 최후의 깽판 칠 기회
여전히 엿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