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며 안녕, 우리 다시 만나
아이의 언택트 졸업식 날
둘째 연의 유치원 졸업식이 있는 날이다.
3년 간의 유치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선생님과 친구들과 작별하고 새로운 만남을 기약해야 하는
중요한 날이지만 아이는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수일 전에 알리미를 통해 학부모들에게 공지되었지만,
클래스팅 영상을 통해 졸업식을 언택트, 비대면으로 실시한다고 한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는 아이는 아직 아침잠이 깨질 않아 부스스하다.
"연아, 유치원 졸업식 지금 볼래? 아니면 오후에 볼래?"
"이따 보고 싶어, 아빠."
하는 수 없이 알리미 공지 내용대로 꾸러미를 받기 위해 걸어서 5분 거리의 유치원으로 향한다.
운동장은 인기척이 없이 황량하기만 하다. 마치 유령 학교인 것처럼.
철봉 쪽으로 걸어가자 연이와 같은 반 친구인 J가 오빠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엄마, 연이 아빠야."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엉거주춤 앞에 쪼그려 앉아 남매를 찍어주던 폰을 거두고 뒤돌아보며 인사하는 J의 엄마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인사한다.
예전 같았으면 가까이 다가가 벌써 졸업이네요. 시간 정말 빨리 가지 않아요. 내년에 초등학교 같이 다녔으면 좋겠다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수다를 떨었을 텐데.
올해는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기가 힘들어 바라보기만 하고 J를 향해 손을 흔들어준다.
내년에는 이전처럼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그들의 밝게 피어나는 웃음을 지켜보고 서투르게나마 따라 웃을 수 있을까? 그들의 허물없는 대화를 엿듣고는 말하는 게 어쩌면 그리 귀엽지, 이건 기상천외한데, 대박인데 하며 마음속으로 맞장구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강당 건물 복도를 들어가니 송이반 선생님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연이는 같이 안 왔나 보네요. 얼굴 보고 싶었는데."
"네, 나올 준비를 미처 못해서. 아쉽네요."
선생님의 표정에 아쉬움이 가득하다. 잠이 덜 깬 연을 채근하여 함께 나왔어야 했나,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도 분명히 선생님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원격 졸업식을 하는 마당에 아이를 데리고 잠깐 외출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내년에 날이 따뜻해지고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연과 함께 유치원 교무실을 찾아 선생님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연이 아버님, 이거 마지막 꾸러미예요. 부피가 크니 조심히 들고 가셔야 해요."
알리미 공지를 꼼꼼히 읽어보기를 잘했다. 그럴 줄 알고 코스트코 쇼핑백을 들고 왔으니.
쇼핑백 바닥에 케잌 만들기 세트를 담고, 그 위에 졸업 앨범과 졸업장 그리고 기타 꾸러미들을 차곡차곡 쌓으니 옆으로 쓰러질 듯 불안 불안하다.
"이건 졸업식 기념으로 모두 드리는 거예요."
선생님이 수줍게 얼굴을 가린 붉은 장미 한 송이와 안개꽃 다발을 내민다.
"감사합니다. 1년 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선생님."
송이반 선생님은 대답 대신 검은 마스크 위로 활짝 눈웃음을 짓는다.
감사하다는 의미, 아이들과 부모님들도 고생 많았다는 그런 의미겠지.
교문으로 나오는 길에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는 J와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는다.
(내년에 웃는 얼굴로 보자. 그때까지 건강히 지내렴.)
집에 돌아오니 아이는 터질 듯한 쇼핑백을 뒤져보며 기뻐한다.
졸업 앨범을 펼쳐 보니 다소 굳은 표정으로 희미한 웃음을 짓는 아이가 서 있다.
이쁘게 꽃단장을 하고 공들여 찍은 이 사진들이 담긴 앨범을 받게 되면, 그동안 같이 지낸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연이가 제일로 키가 크네. 그래서 선생님이 친구들 가운데 서게 했나 보다."
"그런가."
아이가 멋쩍은 표정으로 사진들을 바라본다.
다른 친구들보다 한 뼘 이상 키가 큰 아이. 그만큼 생각도 깊고 배움도 빠른 아이다.
꾸러미를 풀어보니 눈길을 끄는 졸업 선물이 몇 가지 있다.
환히 웃는 아이의 모습이 시계판에 인쇄된 벽시계는 거실 벽에 걸린 우중충한 시계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매일 시간도 보면서 연의 환한 얼굴도 볼 수 있으니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더구나 물 흐르듯 부드럽게 초침이 움직이는 무소음 시계라 신경도 거슬리지 않고 더욱더 유용할 듯싶다.
아이의 졸업복을 입은 사진이 담긴 액자도 마음에 쏙 든다. 가장 선명하고 잘 찍힌 사진을 고른 듯하다.
요즘 유행인지 베젤이 없는 프레임리스 액자다. 액자보다는 패널(panel)에 가까운 듯도 하다. 전면을 덮은 코팅 필름을 벗겨 내니 기존 유리 액자에 비해 사진의 퀄리티도 좋고, 깨질 염려도 없어 관리하기 편할 듯하다.
다만 표면에 화학 처리를 했는지 나무 타는 냄새가 실내에 퍼지는 단점이 있다. 베란다에 내놓아 며칠 동안 건조시키고 바람을 쐬어 줘야 할지 고민 중이다.
장미꽃 다발은 깨끗한 유리병에 물을 반쯤 담아 꽂아 둔다. 식탁 위에 놓아두면 크리스마스 즈음에 수줍게 가린 붉은 얼굴을 활짝 보여주겠지. 함께 꽂은 안개꽃 한 자락이 밤에도 외롭지 않게 말을 걸어주리라.
아이들의 관심을 가장 끌만한 선물은 다름 아닌 '크리스마스 케잌 만들기' 세트다.
동그란 카스텔라 시트에 짤주머니에 가득 담긴 생크림 그리고 초콜릿, 아몬드 슬라이스, 건포도에 케잌 띠, 촛불까지 포함된, 집에서 아이들 힘으로 케잌을 완성시킬 수 있는 구성이다.
게다가 셰프(제빵) 모자까지 들어 있어 연이 몸소 착용하고 케잌 만들기에 나설 수 있었다.
다 만들고 나서 화룡점정으로 촛불을 모두 꽂아 불을 밝히고 다 함께 소원을 빌어본다.
아이들의 소원은 확실치는 않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선물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 소원은 간단하다. 보통 아빠들의 소원이라면 크게 다르지 않을까 싶다.
(부디 내년에는 몹쓸 코로나가 멀리 물러가게 해 주시고, 하는 일마다 대박 터지게 해 주세요.)
케잌 칼로 한 조각씩 잘라 가족들에게 배분하고, 나도 한 조각 입에 넣어본다.
달달한 생크림이 폭신한 카스텔라와 어울려 혀 끝에서 사르륵 녹아 금세 사라진다. 유독 험난하고 더디 가던 2020년도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그런 맛이었다.
오후에는 클래스팅을 통해 졸업식 영상을 시청한다.
오프라인의 식순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하고, 애국가도 부르고 다 하지만 열고 닫는 말(개폐회사)은 과감히 생략한 듯하다. 아이들이 지루해 할 수 있으니 좋은 방향이라 생각한다.
이어서 지난 1년간 송이반의 풍경이 연속 사진으로 재생된다.
마스크를 쓴 아이들이 띄엄띄엄 일정 거리를 두고 수업을 하는 모습은 어색하기 그지없다. 작년 종업식 때의 옹기종기 사이좋게 붙어 지내던 영상과 비교해 보면 천지차이라 할 수 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 가까이에 머무르는 사진을 좀체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들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체 사진을 보면 송이반의 전체 아이들이 출석한 경우는 거의 없다. 코로나로 인해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거나 외부의 전염 속도가 심상치 않으면 집에 머무르는 날이 많았다는 증거 이리라.
또한 현장 학습을 아예 나가지 못한 탓에 사진의 배경은 오로지 교실, 운동장 그리고 학교 뒤켠의 생태 체험 공간뿐이다.
연은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을 가리키고는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한다. 자신이 등장하면 이건 눈사람 만들던 수업이야, 요건 도자기에 그림 그리던 시간이야 하며 설명하기 바쁘다.
이윽고 졸업장과 아이들에게 맞춤으로 수여되는 상장을 전해준다. 연은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골고루 먹었다고 하여 '골고루 냠냠' 상을 받았다. 그 매운 김치와 당근, 오이, 호박 등을 가리지 않고 먹었다니 이보다 더 큰 상이 어디 있겠는가? 덕분에 아이의 키가 쑥쑥 자라고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란 듯하다. 아이에게 졸업장과 상장을 건네주며 진심으로 축하해 준다.
이어 송이반 선생님이 직접 남긴 편지가 화면에 비치며 낭독된다.
- 세상의 별처럼 언제나 밝은 송이반 친구들에게
선생님은 아직도 교실에서 너희들의 환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비어있는 교실을 보니 너희들이 너무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이 들어. 우리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함께 보내지 못해 너무 아쉬웠어.
너희와 함께 한 시간들을 잊을 수 없을 거야.
...
송이반 친구들!
우리가 연습해왔던 '졸업을 축하합니다' , 졸업가 기억하니?
그 노래에서 나오는 가사처럼 '오늘 우리가 헤어지는 것은 더 멋진 만남 위함이고, 오늘은 더 큰 세상을 만나는 멋진 날'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
그동안 함께 지낸 우리 친구들이 어느새 유치원을 졸업한다니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초등학교에 가서도 새로운 추억 많이 만들고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지내.
선생님은 너희의 모든 꿈을 응원할게. 송이반 사랑해!
연은 아무 말 없이 손목의 플라스틱 팔찌를 집어 올리며 노트북의 편지 내용을 바라본다.
편지 배경에 새겨진 각양각색의 하트 패턴이 아이의 움츠린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편지 내용이 천천히 사라지고 '졸업을 축하합니다' 가사가 화면에 떠오른다.
우리가 함께 한 날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영광의 자리 이 순간 졸업을 축하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모님 고맙습니다
후배들 정든 친구들 모두 다 사랑합니다
오늘 우리가 헤어짐은 더 멋진 만남 위함이죠
오늘은 더 큰 세상을 만나는 멋진 날
졸업을 축하 축하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의 얘기 노래합니다. 사랑합니다
내일을 향해 큰 꿈을 향해 달려갈게요. 할 수 있어요
마음의 얘기 노래합니다. 사랑합니다
졸업을 축하 축하합니다. 부모님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의 얘기 노래합니다. 사랑합니다. 새로운 시작
아이가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대목에서 목이 메었는지 어깨를 실룩인다.
졸업가 노래가 중간에 끊어지면 안 되기에 내가 굵다랗고 어색한 목소리로 다음 가사를 이어 부르자
아이가 돌아보며 씨익 웃는다.
"아빠 노래 엄청 못 부른다."
"아빠는 이 노래 처음 부르는 거니까. 연은 유치원에서 연습 많이 했나 보네. 엄청 잘 불러."
"선생님이랑 계속 연습했거든. 저번 시간엔 글쎄. 친구 J가 노래 부르다가 중간에 울지 뭐야. 선생님이 머리랑 등 쓰다듬어 주면서 괜찮다고 위로해 줬어."
"그렇구나. 연은 지금 노래 부르니까 마음이 어때."
잠시 아이는 숨을 고르고 재생이 멈춘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본다.
화면에는 '웃으며 안녕, 우리 언젠가는 또 만나기를!'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선생님이랑 친구들 생각나서 울 뻔했는데 지금은 괜찮아."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억지로 눈물 참으면 그것도 몸에 해로워."
"응, 아빠."
"나중에 졸업 영상 다시 보고 싶으면 언제든 아빠한테 말하고."
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벌게진 아이의 눈에 희미한 웃음이 번지며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난 아이의 단정한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는 홀로 거실로 나온다.
아이는 노트북에 표시된 '안녕' 글자를 손으로 매만지며 잠시 상념에 빠진다.
홀로 남은 아이의 눈 앞에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지난 1년의 추억 되새김을 방해하지 않으려 방문을 살짝 닫아준다.
웃으며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