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복수는
방탕하고 무심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일삼는
주인에게 행하는 어느
몸의 앙갚음이다
새벽 4시가 넘었을까
녹슬고 무딘 송곳으로 양 옆구리
번갈아 찌르는 익숙한 통증 덮치길래
퍼뜩 잠이 깬다
오랜만이네 근 1년 만인가
2019년 겨울 그때는 멋도 모르고
시간이 지나면 나을 줄 알고 참고 또 참다가
119 구급차 불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결국은 츄리닝 차림으로 집 나와
새벽 택시 올라타서는 가까운 응급실로 내달아
(난생처음 응급실 침대에 몸을 뉘었네)
여기서 제일 센 진통제를 놔주던지
당장 배를 가르는 수술을 하던지
제발 어떻게든 해달라고
애꿎은 레지던트 의사 가운 붙잡고
사정사정하다 견디지 못해
악을 질렀네
이러다가 죽는구나
이러다가 영영 가족과 이별하는구나
참으로 허무하게도
십 년 넘게 버틴 아버지 소가죽 구두처럼
질기고 질긴 삶을 끝장 내려면,
시꺼먼 저승사자 등짝에 업혀서는
삼도천을 맨몸으로 헤엄쳐 건너기 위해
육신이 산산이 쪼개지는 이 정도
고통을 겪어야 하는구나
살짝 손끝으로 찍어 그 맛을 보았네
사람은 물이다 물처럼 유유히 흘러야 한다.
참으로 명쾌한 단순 명제를 무시한 채
물 대신 독한 알코올을
순수한 물 대신 카페인을
심지어 몸의 뿌리가 메마르도록
바삭 가물어 지내다 보면
수분이 알알이 빠져나가 모래사막의 한 뼘
오아시스마저 증발해 버리면 사방이 바늘 돋친
사금파리가 돌처럼 굳어 데구르르 아래로
아래로 굴러 떨어져 마냥
이대로 살 것처럼 태평하던
한 인간의 앞길 가로막고 까마득한
절벽 끝으로 몰아붙인다는 걸
미련스레 마흔 넘어 일종의 통과 의례처럼
겪어 보고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네
새벽잠 확 달아나
비틀거리는 애먼 걸음으로
배 불룩한 주전자 부여잡고
보리차 한잔 가득 따라 그대로 원샷하고는
어스름한 그늘 감도는 거실로 나와
심장 박동 따라 쿡쿡 쑤시는
옆구리 어루만진다
소파에 앉아 눈 감고 '내 몸'에게
이리 와 앉으라 한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다
다가오더니 조심스레 귀엣말을 전한다
새해부터 삐걱거려 미안허네
그간 남들 다 마시는 술 안 마시고
끽연도 멀리 하고 카페인도 마다 하는 거 고맙네
다만, 요즘 자네 마음이 헛헛한지 유난히
단 것이 과하게 들어오고 힘쓰는 운동을 게을리하는군
단단하던 근육이 점점 물렁해지고 옆구리살이
축 늘어지는 게 영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난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대로 하겠노라
다시 살겠노라 고개를 끄덕인다
아, 1년 전 그 일로 유감이었다고 말한 적 있었나?
실은 나도 그때 경황이 없어서 말이야 제대로 사과를 못 했군
하지만 내 말을 무시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한 번쯤은 경고를 할 타이밍이긴 했어
앞으로는 그런 일 없었으면 하네
그는 아니 내 몸은 할 말을 다 전했는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태어날 때부터 일심동체
하나라 여겼던 가족보다 친구보다
세상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자부했던 내 몸이
그간의 무관심과 홀대와 방치를
참고 견디다 못해 지름 0.8cm
모난 돌을 나 모르게 공들여 빚어서는
몸 밖으로 흐르는 하수관을 틀어막는
세상에서 가장 냉혹하고 잔인한 복수를 감행한
1년 전 그날,
그날은 내가 한 발짝만 물러서면
자욱한 안개에 가려진 죽음의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생사의 가느다란 경계선에 서 있음을
난생처음 깨달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