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닭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지네와 얽힌 이야기 한 토막

by 라미루이









군 제대하고 구례에서 온 가족이 모여 살았을 때였다.

전원생활을 표방하는 그 집 뒷산에는 밤나무가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예부터 달큰한 밤나무 내음이 동하는 습한 곳에는

붉은 다리가 여럿 달리고 광택이 도는 까만 몸체를 가진

'지네'라는 요물이 출몰하는 경우가 많더라.


어느 날은 밤이 깊어 방의 불을 끄고 이부자리에 누웠는데 어디선가 따다닥 따닥, 타그득 하는 딱딱한 물체가 연달아 부딪히는 기분 나쁜 소리가 벽을 통해 전해지는 게 아닌가.

잠이 확 달아나 부리나케 일어나 불을 켜니

아니나 다를까,

어른의 중지만 한 몸집의 시커먼 지네 한 마리가 벽에 탁 달라붙은 채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오늘은 편히 자기 글러 먹었구나.

외마디 탄식과 함께 이 징그러운 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기 구울 때 쓰는 양은 집게를 가져와 그놈을 집어서는 병목이 기다란 유리병에 감금하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그 이후로 이 요상한 놈이 집 안에 들어오는 것에 재미 들렸는지

크고 작은 지네들이 어둠을 틈타 창틈으로 몰래 들어와서는

베갯머리에 함께 누워 있기도 하고

새벽녘에 화장실을 가다 하마터면 밟을 뻔하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숨바꼭질을 거듭하다가

결국은 곤히 주무시던 아버지의 목덜미를 깨무는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퉁퉁 부은 뒷목을 부여잡고 병원에 다녀오신 아버지는

동네 어르신의 조언에 따라 중닭 대여섯을 들여와 뒷산에 풀어놓고 기르기 시작했다.


그중에 수탉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놈이 타고난 영물이라.

여느 닭에 비해 체격은 두 배이고, 검푸른 깃털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니

벌건 볏을 자르르 세우고 매서운 눈매를 한껏 몰아치면

반경 3미터 이내 산까치나 참새 같은 뭇새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놈의 특기는 자신의 발아래 눈치 없이 꾸물거리는 지네의 마디 사이를 날카로운 부리로 인정사정없이 쪼아 넉다운시키고는 발톱으로 지그시 누르고 부리로 상대를 길게 잡아 올려 속살을 뜯어먹는 것이었다.

수탉은 (지네 입장에서는 명백한 학살 행위였을) 그 포식 행위를 꽤나 즐겼는데 덕분에 그는 날이 갈수록 가슴팍에 포동포동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네들 또한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 놈들은 해가 지고 달이 갸느란 날을 골라 암탉들이 곤히 잠든 틈에 품으로 파고들어서는

날갯죽지와 같은 연약한 부위를 골라 바짝 독이 오른 발톱을 깊이 박아 넣곤 했던 것이다.

깊은 밤에 잠 못 이루고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사방에 울려 퍼지는 꽤액 꽥하는 고통스러운 비명이라니.


밤나무가 깔린 뒷산에서 이런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아버지,

하필이면 친할머니가 구례에 내려와 얼마간 머무르게 되자 지극한 효성을 지닌 그는

몸소 아끼던 수탉을 잡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 수탉은 영물이니 잡지 말자고, 그놈은 체격만 장대할 뿐 살코기는 질기고 질긴 노계와 같을 거라고,

이왕 잡을 거면 야들야들해 보이는 암탉을 잡자고 아버지를 설득했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수시로 고요한 산야를 흔들고 깨우던 수탉의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온 집안에 구수하면서 비릿한 닭뼈 고는 냄새가 보글보글 흘러넘치기 시작하는데..

나주에서 오신 친할머니는 지친 몸을 소파에 뉘고 편히 쉬고 계셨다.

"이 집 뒤에 밤나무가 지천이던데 가을이면 마대 자루 한가득 알밤 채우고 남겄어."

"네, 할머니. 이번 추석 쇠고 날 잡아서 자루 그러 메고 함 올라가야죠."

"그나저나 나 왔다고 그리 공들여 키우던 장닭을 잡아서 어쩌. 아깝게시리. 글구 온종일 집 지키고 산중에서 내려오는 잡스러운 것들 막아주던 놈을 그리 없애 버리면 우환이.."

정말로 그런 횡액이 닥칠까 입을 다무는 할머니.

"어머니, 아쉬운 소리 마셔요. 그놈이 요즘 덩치도 커져서 말도 안 듣고 툭하면 덤비고. 날 지 아래 두려고 별짓을 다하더라니까요. 벼르고 벼르다가 어머니 오신다길래 오랜만에 몸보신도 할 겸 그놈 목을 칵.."

"워매, 그냥 나물 반찬 꺼내서 같이 먹으면 되지. 뭘 그리 추접스럽게 피를 보고 그런다야."

"엄매는 그런 흉한 생각 하덜 말고 맛나게 자시면 된당게."
"그래도.."

말끝을 흐리는 친할머니가 소파에 앉은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으악, 에그머니낫! 저, 저게 뭐시냐?"


아버지를 포함한 우리는 소파 아래서 윤기가 도는 꺼먼 머리를 바득바득 쳐들고 따닥 소리를 내며 기어 나온 그 '요물'을 보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두 다리를 잽싸게 소파 위로 올리며 뒤로 물러섰고, 우리는 그놈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어쩔 줄 몰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놀랍게도 그 지네는 지금까지 목격한 놈들 중에 가장 거대한 놈이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옛날 옛적에 어여쁜 아가씨를 제물로 삼아 잡아먹으려다, 그녀에게 은혜를 입은 두꺼비에게 잡아 먹혔다는 지네와 관련된 설화가 번뜩 떠올랐다. 그 이야기는 사실과 동떨어진 허구가 아니었다. 어느 깊은 산중에서 은거하다 출사표를 던졌는지 족히 십 년은 묵은 듯한 그 지네는 몸길이가 20cm는 넘을 만치 구불구불했고, 몸체에는 적어도 100개의 다리가 하나의 다리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흡사 흑갑을 두른 뱀을 연상케 하는 겉모습이라니.

"저, 저놈 잡아!"

아버지는 벽에 걸린 파리채를 들고 덤볐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통하지 않을, 턱도 없는 무기임에 틀림없다.

저 괴물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집안으로 들어온 걸까? 아무래도 우연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오늘, 저놈이 나타났다. 그것도 할머니가 오시는 날을 골라서. 어제 아버지는 수탉을 잡아 피를 빼고 깃털을 뽑아 해체하여 솥단지에 넣어 밤새 끓였지. 비릿한 살 내음이 코 끝을 자극하는, 온 집안에 낮게 깔린 끈적한 공기. 가스레인지 위에서 팔팔 끓고 있는 솥단지의 뚜껑이 비스듬히 열려 있다.

"얘야. 저그 솥, 불 좀 줄여야겠다."

할머니의 다급한 외침에 난 서둘러 가스레인지의 불을 아예 꺼버렸다.

커다란 솥 안에서 뽀얀 국물에 반쯤 잠겨 허연 속살을 드러낸 다리뼈가 유난히 굵다랗다.

'혹시나 저놈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앞다리들과 독족毒足을 드러낸 왕지네는 살기등등한 기세로 물러설 기미가 안 보인다.


그렇다. 저놈은 요물 중의 상 요물. 다리 여럿 달린 미물이 영악하기 그지없구나!

그간 자신의 일족을 무참히 학살한 수탉의 생피와 익어가는 살코기 내음을 참지 못해 상갓집에 쳐들어와서는 저리도 독살스러운 낯빛으로 조문을 올리는 것이로구나.

해묵은 지네가 닭고기를 즐겨 먹는다고 누군가가 읊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닭을 삶아놓은 솥의 뚜껑을 단단히 닫지 않으면 저 요물이 슬쩍 맛을 보고 독을 풀어놓는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도 전해진다지.

저 지네는 철천지 원수에게 당한 동족의 한을 갚고, 더불어 그의 살 한 점을 맛보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겠지. 저것은 절대 살려 보낼 수 없다.

"쿠웅!"


난 다탁에 놓인 두꺼운 식물도감 양장본을 들어 뻔뻔스러운 조문객의 머리 위에서 곧장 떨어뜨렸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자면,

자신의 은거지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출사표를 던진 만큼 그에 상응하는 깔끔한 최후를 맞이할 자격도 있는 법이다.

떨리는 손으로 도감을 천천히 들어 올리니 처참하게 짓눌린 절지동물의 체절과 떨어진 다리들이 버둥거린다.

[영장류에게 명하노니, 그 미물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하라!]

알 수 없는 명령에 이끌려 다시 한번 더 높은 지점에서 도감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보다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며칠 후,

솥단지에 담긴 닭백숙은 할머니는 물론이고 온 가족들이 손을 대지 않아 할 수 없이 동네 이웃 몇몇 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마 그 닭은 종일 산을 타서 그런지 근육질이라 무지 질기다는 불평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또 다른 지네 무리가 불시에 집을 급습할까 두려운 나머지 새로운 수탉을 급히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가 외출을 하려고 운동화를 신으려는데 글쎄,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따끔하는 거다. 마치 뾰족한 침으로 찌르는 것처럼.

이내 가볍지는 않은 묵직한 통증이 번진다.

깜짝 놀라 신발을 벗어 뭐가 들었나 하고 탈탈 털어보니..

5mm도 안 될만한 크기의 조그만 실지네 한 마리가 바닥에 톡 떨어져 저 구석으로 도망가기 바쁘다.

'너희들 그 조그만 머릿속엔 복수밖에 들은 게 없더냐. 요상하고 해괴한 족속들 같으니.'

일체의 망설임 없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신발을 들어 힘껏 내리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수소문 끝에 이전 장닭보다는 미덥지 않지만 제 몫을 하는, 어엿한 수탉이 뒷산에 자리를 잡았다. 더 이상 독이 오른 미물이 우리 영역을 침범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