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은 큼지막한 최신 티비를 바라보고 마리오 카트를 즐긴다던지, 피트니스 아니면 흥겨운 댄스 게임을 즐긴다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화려한 비디오 게임에 아이들을 노출시킬 생각은 없다.
그나마 어릴 때라도 동그라미, 다이얼 등 정형화된 버튼이 배열된 게임 패드보다는 보드 게임의 다양한 카드나 퍼즐 조각을 직접 만지는 촉각적인, 아날로그적인 경험을 최대한 늘리자는 것이 아빠로서의 놀이 원칙이자 방향이다.
아이들 또한 언젠가는 각자의 스마트폰을 다룰 것이고, 노트북으로 간단한 게임을 즐길 것이며 구미가 당기는 최신 비디오 게임을 접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디지털 세상의 가려진 이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를 알려 주고 싶다.
80년대 초, 동네 골목길과 놀이터에서 코흘리개 친구들과 말랑한 짱구 볼을 가지고 맨손야구를 하고, 딱지 치기를 하고 산과 들을 종일 뛰다니며 메뚜기를 잡고 개구리를 건져 올리던 또래 아이들. 그들이 학교 근처에 잇따라 오픈한 전자 오락실의 문을 열고 너구리나 동키콩, 버블버블을 처음 플레이했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이어 등장한 닌텐도의 패미컴과 애플이나 MSX 같은 8비트 PC를 가까운 친구의 집에서 처음 실물로 접했을 때의 충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의 오프라인 놀이 문화를 게임 안으로 끌어들인 신기기는 들불처럼, 전염병처럼 이 집 저 집으로 번져갔다.
그때 당시에는 컴퓨터와 비디오 게임 같은 디지털 기기, 콘텐츠의 혜성 같은 등장과 급속한 발전이 아이들의 놀이 문화뿐만 아니라, 우리네 생활 패턴까지 180도 바꾸어 놓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조잡하기 그지없던, 일일이 찍어 그렸을 법한 도트 그래픽이 모자이크처럼 번지는 그 시절 오락실과 패미컴의 게임들은 작금의 할리우드 블록 버스터 무비를 방불케 하는 화면과 스토리를 자랑하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초현실인지 분간이 어려울 만한 가상현실 게임으로 거듭났다.
초창기 IBM-PC의 대작 롤플레잉 게임이라 회자되는 <울티마 6>는 당시 플로피 디스크 6장 분량으로 출시되었다. 다른 월드로 건너갈 때마다, 특정 던전에 내려갈 때마다 디스크를 갈아 끼우라는 메시지에 얼마나 짜증이 나고 귀찮던지. 이제 그 정도 퀄리티의 게임은 한 손에 들어가는 모바일 기기에서 가볍게 플레이하고, 도중에 걸려오는 전화 콜과 급한 메시지에 멀티로 응답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데스크톱(Desktop). 즉 책상 위에 직육면체의 빌딩을 닮은 본체를 올리고, 그 못지않게 한 덩치 하는 단색 모니터를 바라보며 서툰 독수리 타이핑 실력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 시절 컴맹들은 20여 년 후, 액정이 반으로 자연스레 접히는 모바일 기기를 한 손에 쥐고 스크린을 터치하며 24시간을 보낸다.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SF 소설에서 다룬 선지적 혜안들이 디지털 기술의 몇 세대를 건너뛴 혁명에 가까운 진화와 쾌속 발달로 말미암아 눈앞에 실현되고, 우리 실생활을 이만큼 바꿔놓은 것이다.
한마디로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세상이 거꾸로 엎어질 수준의 변혁이 단기간에 우리를 덮친 셈이다.
양지가 무한정 넓어지면 음지는 설 자리가 없어지는 법. 바닷물이 넘치면 몇몇 섬은 수면 아래로 잠기는 법이다.
디지털 기술과 콘텐츠가 우리 삶 구석구석 스며든 만큼, 우리의 어린 시절을 정겹게 다채롭게 아기자기하게 꾸며 주었던, 아날로그적인 즐길 거리들은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7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은 그나마 본격적인 디지털 세대로 넘어가기 전, 유년기에 골목길 & 놀이터 문화로 대표되는 아날로그스런 경험을 일부라도 겪어본 세대였다. 이른바 '아날로그 막차'에 가까스로 올라탄 세대라고나 할까. 지금 태어난 세대들은 누군가 추억을 소환하여 일부러 찾거나 소비하지 않는 한, 아날로그와 함께 하는 시간을 생략하고 바로 디지털 세계로 직행할 가능성이 높다.
갈수록 영역이 줄어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판의 경계에 선 채, 한쪽 발을 양쪽에 디딘 나로서는 어느 한쪽, 특히 강렬하고 유혹적이면서 치명적인 콘텐츠가 넘치는 디지털 쪽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에 대해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 세계의 기반을 닦은 콘텐츠 중에 우리가 특히 열광한 것은 '게임' 그리고 'PC 통신'이었다.
오락실에서 손때 묻은 동전을 넣고 플레이하던 게임을 집에서도 티비를 통해 즐기고, 다양한 최신 게임을 다운로드하여 원하는 만큼 컴퓨터에서 즐긴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제대로 먹힌 수, 외통수에 가까웠다.
나 또한 20대부터 온갖 게임을 즐기며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과히 '중독'이라 할 만큼..
사춘기를 장악했던 기나긴 방황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했던 나. 대인을 기피하고 방안의 천장 금만 멍하니 올려보며 시간을 죽이던 그 시절의 우울과 무기력감을 잠시나마 잊게 한 것이 게임 라이프였다. 가정용 PC가 보급되면서 앞다투어 선보인 각양각색의 게임들은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테트리스, 삼국지, 남북전쟁, 대항해시대, 울티마, 심시티, 둠, 퍼스트퀸, 파이널 판타지, 인디아나 존스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엔 그 수가 결코 작지 않다.
당시 나에겐 모든 고민거리를 일거에 쓸어 버리고 희열을 맛보게 하는 마약과 같은 존재였다.
더불어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으로 대표되는 그 시절 PC 통신을 통해 외부와의 소통에 대한 목마름을 달랠 수 있었다. 덕분에 내 부모님은 월 10만 원에 달하는 전화비 고지서를 받고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말이다.
그 수많은 게임들과 동호회, 쉼 없이 재잘대던 채팅이 없었다면 난 골방에 틀어박혀 공황 발작에 몸부림쳤거나,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거나 둘 중에 하나였으리라.
난 그것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20년 전, 과거의 나 자신으로 회귀한다 해도 비슷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때 처지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다. 대학교 전공은 컴공이었고, 내 주변엔 식음을 전폐하고 밤새도록 초창기 게임과 통신 커뮤니티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들이 넘쳐났으니까. 그렇게라도 중독되지 않으면 막 출항한 디지털 쾌속선은 우리를 항구에 남겨두고는 대양 저 멀리, 사라질 것만 같았으니까. 그 배에 승선하여 야간 항해를 거듭한 끝에 미지의 제도에 다다른 우리는 퍼엉! 하는 굉음을 동반한 대폭발을 수평선 너머에서 접할 수 있었다. 빅뱅에 근접한 '인터넷 혁명'이 전 지구를 휩쓸었고, 우리는 해일에 가까운 파도를 타고 각자의 밥벌이를 해낼 수 있었다. 멋진 휴양지의 해변에 다다른 누군가는 대박을 치고, 바다를 헤맨 대다수는 중박을 치고 또 극소수는 난파를 당해 쪽박을 차고.. 그런 수순으로 각각의 삶이 흘러갔다.
돌이켜보면 극단적으로 치우친 디지털 라이프로 인해 나름 얻은 것도 있었다. 하나의 완성된 게임에는 한 편의 글처럼 또는 한 폭의 그림처럼 누군가의 내면이 고스란히 담긴다. 아무리 잘난 그래픽으로 캐릭터로 효과음으로 범벅해 위장하고, 겹으로 둘러싼다 해도 제작하는 누군가 또는 다수의 경험과 상상과 진심이 약간의 트라우마 양념과 뒤섞여 어떤 식으로든 표현되는 것이다. 플레이하는 게이머는 이를 본능적으로 느낀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 사람, 나와 비슷한 경험을 겪은 듯하네."
"그래, 이런 파격적이면서 신랄한 게임을 세상에 선보이려면, 어린 시절의 고통과 억압이 임계치를 넘어야 하는 법이지."
어떤 게임에는 통렬한 사회 풍자가 숨어 있고, 그에 못지않은 냉철한 자아비판도 넘쳐흐른다.
창작자가 무의식적으로 설계한 구불구불한 미로와 같은, 게임의 숨겨진 회로도를 따라 헤매다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배꼽을 잡고 웃기도 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서사에 놀라기도 하고, 강적을 무찌르는 쾌감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세기말의 아포칼립스가 휩쓴 폐허를 홀로 방황하며 울적해지기도 한다. 게임의 끝자락, 엔딩에 다다를수록 돌아보는 것은 눈부시게 그려진 스크린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그 순간 직사각의 스크린은 '투명한 거울'로 서서히 변화한다. 하나의 게임을 끝까지 플레이하면 어떤 식으로든 그 게이머의 내면에 영향을 끼친다. 맨손에 쥔 무딘 칼날이 스윽, 스크래치를 남기는 것처럼..
그런 면에서 공들여 만들어진 한 편의 게임은 노회한 거장의 손길이 닿은 영화에 버금가는, '종합 예술'에 가까운 장르라고 재평가받을 만하다. 요즈음 출시되는 대작 게임의 기나긴 엔딩 크레디트와 영화의 그것을 비교해 보라. 결과물이 수작이든 범작이든 또는 망작이든, 하나의 완성된 창작물을 쌓아 올리기 위해 뛰어든 수많은 스태프들의 피와 땀이 묻어나지 않는 콘텐츠는 세상의 빛을 보기조차 어렵다는 사실.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게임은 그 창조물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고, 영화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으로 온전히 감상하는 형태의 그릇이라는 것이 다를 뿐.
그럼에도, 이런 무시할 수 없는 내세울 만한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디지털 세계에 두 발을 모두 담그고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가벼운 처방약이라도 과량으로 복용하면 환각을 일으키는 마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두 발이 빠진 그 늪은 일천한 역사를 지녔지만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오하고, 치명적인 매력을 내뿜는 팜므파탈이 저 아래서 손짓하고 있다.
'주저하고 망설이지 마. 더 깊이 내 안으로 들어오라. 따스한 내 품에 안겨 영원토록 머물고 또 머무르리라.'
시간이 흐를수록 두 다리는 삼켜지고, 온몸이 끝도 없는 수렁에 잠기려 한다.
이쯤에서 그만! 하고 발을 뺄 수 있는 단호한 절제심과 디지털 월드 바깥에도 인류의 탄생과 더불어 그 역사를 같이 한 아날로그의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 지혜가 필요하다.
누군가가 정해준 룰대로,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야만 하는, 가상의 캐릭터가 현란하게 움직이는 사각의 스크린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생활이 정상일 수는 없다. 실체가 없는, 텍스트와 이모티콘으로 본심을 가리고 표정을 알 수 없는, 숨결이 전해지지 않는상대와의 온라인 대화는 때로는 가식적이다 못해 시간이 흐르면 옅은 먼지처럼 스러지고 만다.
필연적으로 외부와의 직접적인 소통은 단절되고, 장시간 볕을 쬐지 못한 낯빛은 회색으로 질린다. 게임이 안 풀려 마우스를 팽개치고는, 어느새 밤을 꼴딱 새우고 어스름한 새벽 네 시의 창 밖을 마주하는 낭패감과 공허함은 날 한없이 움츠러들게 했다.
무한해 보이지만 실상은 한정된, 가상 세계에 갇힌 나는 갈수록 더 강렬한 자극과 새로움을 갈구하며 방문을 걸어 잠그고 서서히 폐인이 되어갔다. 그로부터 풀려난 것은 몇 년이 흐른 후.
어쩔 수 없이 군대에 끌려가다시피 입대하고, 복학생이 되어 학교 동아리에 몸을 담고 외연이 넓어진 후에야 방 한 구석 책상에 올려진 컴퓨터와 모니터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었다.
한때는 쉰을 지나 환갑이 넘어서도 친한 이들과 온라인 게임을 즐길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안타깝게도 세월의 흐름과 노화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도 어찌할 수 없었다. 마흔이 넘은 지금, 거대한 가상 도심에서 펼쳐지는 1인칭 시점의 총격전을 펼치면 얼마 되지 않아 멀미를 하고 어지럼증을 느낀다. 선명한 화질의 티비에서 눈을 떼지 않은 나머지, 안구는 모래사막처럼 말라붙은 채, 제발 창밖 푸른 하늘로 눈길을 돌리라고 건조증을 호소한다.
게다가 이제는 웬만큼 혁신적이고, 기존의 구태를 깨뜨리는 참신한 게임이 아니면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아, 지겹다. 지루하다. 긴 하품이 나올 만큼. 대부분의 게임 플레이가 그토록 꺼리던, 아무 의미 없는 노가다로 느껴질 만큼. 할 만큼 하고 넘치도록 즐긴 것일까. 아쉽지만 그렇다. 우리는 노화와 그에 따른 노안, 치미는 구토증, 더 심각하게는 게임 불감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바둑과 장기, 체스 같은 올드하다고 치부하는 아날로그 게임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미 부인할 수 없는 늙어감을 인지한 내 두 다리는 디지털 월드라는 늪에서 빠져나온 지 오래다.
아이들은 그런 소모적인 나날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양한 삶의 가능성에 대한 시도로 넘쳐야 할 내 젊은 시절을 스킵하고, 단순하게 축약해 버린 '디지털 중독'이라는 시행착오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디지털이 장악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어딘가에는 아이들이 미처 즐기지 못한, 아날로긱한 보물이 무궁무진 숨겨져 있노라고 넌지시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심심해하면 난 거실에 놓인 4X3단 책장을 가리킨다. 그 안에는 그동안 벼룩시장이나 온라인 장터에서 쟁여둔 각종 보드 게임이 칸칸마다 가득 담겨 있다.
"아빠, 오늘은 이거 할래. 피라믹스(Pyramix)."
거실의 요가 매트 위에 옹기종기 앉아 피라미드 형태의 보드판을 펼친다.
각기 다른 패턴의 주사위 큐브는 일일이 손으로 쌓을 필요 없이, 하늘에서 폭우가 내리듯 양손에 가득 담아 우루루 쏟으면 지들이 알아서 자리를 잡는다.
가위바위보를 통해 턴을 정하고 플레이를 시작한다. 둘째 연이 성급한 마음에 순서를 헷갈려 자신이 먼저 큐브에 손을 대기도 한다. 아빠 차례인데? 하고 주의를 주어 순서를 바로잡지만, 가끔씩은 슬쩍 눈 감고 봐주기도 한다. 그래야만 승률이 월등히 높은 언니와 아빠에게 핸디캡이 주어지니까.
그래야 한두 번은 둘째가 마지막 셈 가림에서 역전하는 명승부를 연출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디지털 게임이 아닌 모두의 손길이 닿는 아날로그 보드 게임에서만 통하는 꼼수이자 묘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