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다다른 곳의 초야

나주에서의 첫날밤

by 라미루이







잠결에 주위가 환해졌다. 백주 대낮처럼 눈이 부시어 잠이 달아나려 한다.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참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센서등이 환히 켜졌다.

녀석도 여기 도착한 첫날부터 유난스레 뛰어다니는 두 아이들의 극성에 신경이 곤두선 탓일까.

누구의 인기척이 녀석을 깨우고 밝혔을까?

난 나주에서의 첫날밤, 간신히 청한 새벽잠을 일깨운 센서등을 원망하다가

왠지 모를 이의 낯선 기척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와 동시에 센서등이 핏, 꺼졌다. 사위가 삽시에 어둠으로 물든다.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자박자박, 들릴지 몰라 귓가를 곤두세워도 고요하고 잠잠하기만 하다.

옆에 나란히 누운 둘째 연이 이불을 버럭 걷어차고 옆으로 돌아누운다.

순간 공중으로 솟은 이부자락이 센서에 스쳤는지 등이 번쩍 켜진다.

난데없는 빛살이 아이의 반쯤 뜬 눈 사이로 파고들었는지 벅벅 이를 갈기 시작한다.

"등을 깨운 범인은.. 바로 너였구나."

난 아이의 무른 유치가 상하지 않게 동그랗게 굽은 등어리를 툭툭 쳐 주었다.

그제야 맷돌처럼 짓갈던 위아래 어금니에 힘을 빼고 다시 잠에 빠져드는 아이.

새액새액, 가느랗게 새 나오는 숨소리에 맞추어 조그만 어깨가 들썩인다.



불투명한 블라인드가 쳐진 창으로 엷은 달빛이 새어 들어온다.

블라인드를 위로 바짝 걷는다면 이 안이 제법 환해질 것만 같다.

저 밤하늘을 밝힌 온갖 별빛이 조그만 창을 통해 쏟아진다면 난 이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리라.

난 누운 채로 어스름한 창 밖을 내다보다가 두 팔을 번쩍 들어 깍지를 끼곤 머리 뒤로 넘겨 베개로 삼았다. 다소 큰 움직임에도 구석 천장에 매달린 센서등은 반응하지 않았다. 녀석도 깜박임을 멈추고 겨우 휴면에 든 걸까? 하지만 두 발을 들어 허공을 휘젓는다던지,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면 분명코 녀석은 벌건 눈을 치켜뜨고 사방을 훑을 것이다.

(옴짝달싹도 못하고, 꼼짝없이 포박당한 신세로군. 난 자다가도 뒤척거릴 적이 많은데 이러다 저 센서등이 수시로 깜박이면 보나 마나 잠을 설칠 테고.. 참 난감하네 그려.)

난 잠이 덜 깬 새벽에 잡생각이 많아졌다. 곁에 나란히 누운 솔과 연 또한 언제 다시 이불을 걷어차고 요란한 잠꼬대를 떨지 모른다. 순간 사방의 벽이 갑자기 죄어들고 간격을 좁혀온다. 밀려드는 압박감. 가슴이 갑갑하다. 낯선 곳에 다다라 머무르는 우리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감시당하는 기분이다. 마치 자진하여 감옥에 갇힌 신세라고나 할까. 목이 마른데도 발치에 놓아둔 물컵에 손을 뻗을 수도 없다.

(역시나 여행지에서 맞는 초야는 뜬 눈으로 지새야 하는 건가. 오늘도 어김없이..)

한 방에 누운 아내와 두 아이는 세상모르고 긴 잠에 빠져 들었다. 심사 고약한 센서등이 온 시신경을 자극해도 그들은 아무 반응이 없다. 잠깐 뒤척이다가 녀석이 꺼지면 코를 골며 다시 숙면에 드는 것이다.



11시 방향에 문제의 센서등. 참으로 예민하여 수시로 잠을 깨우네요.



(에라, 모르겠다. 물이나 마시자.)

타는 듯한 갈증을 참지 못하고 난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켰다. 여지없이 불빛을 뿜어내는 녀석.

괘씸하고 원망스럽다. 아랫목에 놓인 미지근한 물을 벌컥 마셔대며 천장에서 날 노려보는 센서등을 향해 중지를 들어 보였다. 녀석은 별안간 더 강렬한 빛을 내뿜는가 싶더니 좌우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허공을 가르며 좌우로 오가는 시계추처럼.. 끝을 모르고 이편저편을 왕복하는 진자처럼. 양 끝단으로 진폭을 넓히는 녀석의 불빛이 길게 이어지는가 싶더니 서로의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이것은 마치.. 어디서 보았더라? 점점이 어른대는 불빛이 멀리서 다가온다. 내 앞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쌔앵, 하고 지나간다. 좌에서 우로 직선을 그리며.. 동시에 난 물보라를 온몸에 흠뻑 뒤집어썼다.

초록색 구형 포니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불붙은 꽁초를 입가에 꼬나 문 택시 기사는 길가에 두 사람이 있음에도 물웅덩이를 피하지 않았다.


여기는 대체 어딘가? 흐릿한 기억이 점차 선명해진다. 머리칼을 타고 이마로 콧등으로 흐르다가 목덜미로 파고드는 빗물에 정신이 깬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다. 저 시꺼먼 하늘이 뻥 뚫려 사정없이 물을 퍼붓는 것처럼.. 왕복 2차선의 국도변. 주위는 온통 암흑이다. 쏟아지는 빗줄기의 튀어 오르는 흔적으로 간신히 주변 사물의 형체를 파악할 수 있다. 난 두 발이 지상에서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 난 누군가의 등짝에 얼굴을 파묻다가 목덜미 옆으로 고개를 빼어 어둠 너머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시선에 저 멀리 점으로 깜박이는 불빛 하나가 잡힌다.

"저기가 나주 큰집이다. 조금만 더 가면 돼."

낯익은 목소리에 난 여기가 어딘지 깨달았다. 나주시 세지면 죽동리. 이하 번지수는 희미하다. 우리는 호남선 통일호에 몸을 싣고 야심한 시각, 영산포역에 도착해 기습 장마를 뚫고 여기에 다다랐다.

때는 아마도 내가 예닐곱 살 무렵일 것이다. 아버지의 너른 등과 단단한 목덜미가 따스하다.

난 그의 어깻죽지를 두른 양팔에 힘을 주어 목을 조르다시피 했다.

"어디가 논두렁인지, 어데가 생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아버지는 가쁜 입을 열 때마다 희부연 김이 새어 나왔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저 앞에 흔들리는 점불을 등대 삼아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디뎠다. 날 업고 있는 상황이니 넘쳐흐른 빗물에 불어 터진 논바닥은 그의 발목을 넘어 무르팍 위까지 집어삼켰다. 결국 그는 신고 온 구두를 진흙뻘 어딘가에 헌납하고 맨발로 험로를 뚫고 나아갔다. 유난히 겁이 많은 난 고개를 파묻은 채 미친 듯이 울다가, 아버지가 더 이상 힘겹게 뒤뚱이지 않음을 깨닫곤 눈물을 거두었다. 어느새 우리는 어느 초가집에 당도해 있었다. 대로변에서 폭우를 뚫고 가까운 큰집에 다다르기까지 장장 30여분이 넘게 걸렸다. 그리 퍼붓던 비는 우리가 기운 처마 아래로 몸을 피하자 거짓말처럼 그쳤다.

주름이 깊게 패고 검게 그은 낯빛의 나주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오메, 워매! 이를 어쩐다냐. 우리 새끼 폭싹 젖어서 어쩐당가. 호들갑을 떨며 우리를 반겼다.



그날 밤 낯선 시골집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옆에 누운 아버지도 자꾸만 뒤척대며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그는 이 집에 의탁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오랜만에 드러누운 뜨끈한 구들장이 영 맨살에 배기는 듯했다. 잠들라치면 센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고쳤다. 얄팍한 한지 겹 대어 바른 문창살 너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부릅 날이 섰다. 새벽 운행을 하는 화물 트럭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집 앞 대로를 내달린다. 어딘가로 향하는 총알택시가 지상을 광속으로 돌파한다.

창호를 뚫고 온 방을 환히 밝히는 대형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잠잠해질 무렵 연달아 다가오는 엔진 굉음이 귓가를 파고든다. 아버지가 한숨을 뱉으며 날 바라보며 돌아누웠다. 잠이 든 척 두 눈을 꾸욱 감은 날 두 팔로 감싸 안으며 그는 가느란 독백을 흘렸다.

"저 지랄 맞은 놈의 불빛은 여전히 거슬리네. 이미 떠난 정 억지로 붙이고 하룻밤 눕기도 쉽지 않아. 내일은 편히 잘 수 있으려나."

그는 채 마르지 않은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실눈 뜬 내 눈가에 들뜬 천장을 뒤덮은, 누렇게 바랜 벽지의 장미 무늬가 새겨졌다. 점점 정신을 잃은 난 노곤함을 참지 못해 잠이 들었으리라.

나주 큰집에 머무른 첫날밤, 그날 아버지는 쪽잠이라도 이루었는지 궁금하다.

이제야 한참이나 뒤늦게.. 꿈결에 그이 혹시 나타난다면 젖은 두 손 붙잡아, 험난한 그 밤 떠올리며 조곤조곤 묻고 싶을 정도로.



퍼뜩 눈앞이 환해진다. 어휴, 눈 부셔. 별안간 불을 밝힌 센서등이 날 바라본다.

더 이상 멀쩡한 사람 홀리는 왕복 운동은 벌이지 않는다.

금성산에 둘러싸인 국립나주숲체원, 외딴 숙소 2층에 누운 살아 숨 쉬는 자들은 아무 미동이 없다.

"아버지.. 맞나요? 여기 어쩐 일로 드셨습니까? 거진 30년 만에 나주 내려온 아들 넘 보러 먼 데서 오셨는지요. 그날 절 둘러업고 맹우를 거침없이 헤치고 가로지른 질퍽한 논두덩, 대로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불빛들의 행렬. 여전하겠지요?"

어릿한 등불이 잠깐 화색이 도나 싶더니 곧 희미해진다.

온색 빛의 여운이 어둠에 밀려 사그라들자 난 취한 것처럼 겨우 잠에 들었다.




* 지난 글>>

나주 큰집을 떠올리다_1 (brunch.co.kr)



* <영산강>_안치환

https://youtu.be/GlVXd9pLZr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