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큰집을 떠올리다_1

by 라미루이
윤은 40년이 흐른 후, 그 집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주변에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곳.
문명을 밝히는 불빛은 오로지 그 집 처마에 매달린 흐릿한 알전구뿐.
비의 바다를 표류하는 나룻배 바닥에 엎드려
눈을 감고, 제발 꿈이기를 바랐지만
눈뜨면 여전히 세상은 지옥이었지.
온갖 고난을 견뎌 외딴섬에 다다라서야 깨달았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잔잔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를."


1982년 10월 어느 날 오후 9시경, 전남 나주시 세지면의 도로 어딘가.


- 이제 내려야 한다. 윤아 잠 깨라! 어서...


호는 뒷좌석을 바라보는 택시 기사에게 구겨진 만원 짜리를 건네주고, 이천 원 남짓 거스름돈을 받는다.

자신에게 기댄 윤의 몸을 흔들어도 뺨을 세게 두드려도 눈을 감은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 이 밤 중에, 억수 같이 비가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구마. 아이 퍼뜩 깨워서 둘러업고 가시구려.

포대 자루라도 있으면 뒤집어쓰고 가면 좋을 텐데... 뭔 놈의 비가 이리 지랄맞게 내리꽂는지...

평소엔 20분이면 오는 길인데 30분 넘게 걸렸소. 운전하기도 영 거시기했구먼.


걱정하는 기사의 말을 뒤로하고, 택시 뒷문을 여니 굵은 장대비가 차 안으로 들이친다.

아이와 마주 본 상태로 안고서 도로 옆 흙길을 밟고 "끙"하고 일어서는 외마디 소리,

세찬 빗소리에 묻혀 짙은 밤안개 어딘가로 산산이 흩어진다.

비를 흠뻑 맞아 말끔해진 초록색 택시는 속도를 높여 멀어진다.

도로 위를 비추던 빛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어 어디에서도 일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호는 잠이 덜 깬 아이를 업은 채 주위를 둘러보는데...

오직 비, 비, 사납게 폭주하는 비가 존재할 뿐.

하늘 아래 피할 곳 없이, 수직 또는 사선으로 꽂히는 비의 맹렬한 기세.

온 사위를 둘러싼 칠흑 같은 어둠마저 그 기세에 눌린 듯 물빛을 머금어 반짝거릴 지경이다.

잠시 후, 윤은 자신의 머리칼을 타고 양볼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입술 사이로 파고들자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 으음. 아빠, 여기 어디야?

- 응, 도착했다. 저기 큰집에...

- 저기,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 저쪽 위에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네. 논에 물이 불어나 둑길이 잠겼으니 조심조심 가보자.

여기 계속 머무를 수는 없어. 어떻게든 큰집으로 가야지.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된다. 다 왔어.


그는 아이의 젖은 귀밑 머리를 헤치고, 조곤조곤 귓속말을 전한다.

용기를 내어, 온 힘을 다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저 어둠과 폭우를 헤치고 나아가자는,

자신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았다.

서울 집에서 출발하기 전, 큰집에 전화를 넣었지만 언제 영산포역에 도착한다고는 확언할 수 없었다.

큰집도 기다리고 있겠지만, 이 험한 날씨에 저 물길을 뚫고 큰길까지 마중 나올 엄두는 못 내리라.

여기 주저앉을 수는 없지. 어떻게든 가보자.

품에 안은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그는 바짓단을 무르팍 위까지 최대한 끌어올린다.

아이도 마찬가지로 물에 젖지 않게 옷 단속을 한다.

택시에서 내린 지 5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빗물을 흠뻑 머금은 바지는 맨살에 찰싹 달라붙어 잘 올라가지 않는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아이.

물난리에 반쯤 잠긴 둥지 안 참새 새끼마냥 겁에 질려 온 몸을 벌벌 떨고 있다.


역에 도착할 당시만 해도 이렇게까지 비가 쏟아질 줄은 몰랐다.

역 광장으로 나오니 두터운 먹구름이 북쪽에서 밀려오고,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 정도였지.

하지만 승강장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큰집으로 오는 중에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하늘에 먹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냘픈 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점점이 빛나던 별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었어. 큰집에 도착할 즈음엔 차창 밖이 빗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차는 물웅덩이를 지날 때마다 한쪽 바퀴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 기우뚱거렸지.


- 아까 영산포 역에서 우산을 하나 사 올 걸 그랬나? 술 댓병 사느라 우산은 생각도 못 했으니.


이런 날씨엔 어떤 우산을 써도 무용지물일거야.


- 구멍가게에서 파는 그까짓 비니루 우산, 오 분도 못 버티고 댓살이 부러져 날아가 버릴걸.

그냥 짐만 될 뿐이야.

아까 택시에서 내릴 때 간신히 챙긴 청주 대짜는 포장한 종이 박스가 두꺼운지 젖은 땅 위에서 멀쩡하게 버티고 있다. 저 놈 들고 가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 않지만, 오랜만에 내려온 큰집에 빈손으로 쳐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빗줄기는 더 거세졌고, 물이 더 불어나면 아이와 건너다가 물살에 휩쓸려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

아이를 등에 둘러업고, 청주를 상자 채로 왼 겨드랑이에 낀 모양새로 그는 논바닥으로 내려갈 완만한 길을 찾았다.

다행히 경사가 완만한 내리막길이 있어 무릎을 굽혀 거의 눕다시피 하여 내려간다.

미끄럼틀 타 듯 내려왔을 즈음 진흙 더미를 밟고 주욱 미끄러져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등에 업힌 아이도 그의 몸에 눌리며 흙바닥에 벌러덩 누웠는데...

어른의 몸에 깔려 버둥거리며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 아빠, 무서워. 집에 가고 싶어... 당장 집에 가.
- 알았어.. 알았어.. 조금만 더 가면 집이야.
제발 울음 좀 그쳐. 제발...


호는 장딴지에 힘을 주어 아이와 함께 몸을 일으킨다.

이미 바지는 흙 범벅이기에 보이지도 않는 둑길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논밭을 가로질러 가기로 한다.

첫 발을 내디디니 수심이 깊지 않아 다행이다. 무릎 아래에서 흙탕물이 찰랑거린다.

하지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무른 바닥으로 발이 쑥쑥 박히며 기우뚱거린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지 않도록 반대편 다리에 힘을 주어 천천히 다음 걸음을 옮긴다.

등 뒤에 업힌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어 대고, 집에 가고 싶다고 발악을 한다.

더 이상 아이를 위로할 만한 따뜻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여 떠오르더라도 입 밖에 내놓을 기력이 없었다.


- 무슨 말을 건네더라도 이 눔의 망할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을 거야.


그는 자신의 목을 뱀 똬리 틀 듯이 감은 조그마한 손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아이의 처진 엉덩이를 한 팔로 힘껏 들어 올리고 물길을 헤쳐 나아간다.

논에 심은 벼는 이미 가을 수확이 끝난 뒤라 발바닥을 찌르는 뾰족한 줄기 끝만 남아있다.

첫 번째 논을 건너자 가슴만치 올라오는 논두렁이 나타난다.

도저히 아이를 등에 업고는 올라갈 엄두가 나질 않아 흙바닥에 내려놓는다.

큰집에 간다고 공들인 운동화가 진창에 잠겨 허연 발목만 보였지만, 아이는 더 이상 울어 제낄 여력이 없다.

청주가 담긴 상자를 두렁 위로 던지고, 아이도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 둔덕 위로 올린다.

올라가기 위해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주르륵" 미끄러져 맨 얼굴을 진흙뻘에 처박을 찰나,

양손으로 언덕을 짚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다.


아빠, 괜찮아? 내가 손 잡아줄까?

아이는 도움이 필요할까 봐 한 손을 길게 내밀었지만, 괜찮다는 의미의 미소를 짓는다.

단단해 보이는 지면을 찾아 반대쪽 발을 힘껏 내디뎌 아이의 곁에 올라서는데...


- 어서 가자! 이제 어려운 길은 다 지났어.

큰아버지가 평소에 물길을 잘 정리해서

넘치지 않아 다행이구나.


아이의 손을 다잡아 거센 우세雨勢를 뚫고, 구불구불 이어진 논둑길을 걸어간다.

오래지 않아 굵다란 배나무 둥치 두엇을 다듬어 붙인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 아래로는 윗 논에서 내려온 황톳물이 콸콸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 자, 다시 업혀라. 여긴 네가 지나가기엔 좁고 미끄럽구나.


이번엔 아이를 가슴팍에 안고 한 손엔 청주 병목을 잡고서 부실해 보이는 다리를 지나간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계류에 약해진 다리 끝단이 무너져 내릴 듯 들썩이기에 재빨리 반대편으로 내닫는다.


휴우, 이제 다 왔어. 고생 많았다...

아이를 땅에 내리려 하니 품에 안겨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그래, 많이 무서웠겠지. 아빠도 두려웠단다.
너와 함께 험한 물길을 헤치고 나아가다, 혹시라도 떠내려 가기라도 한다면...
무슨 사고라도 난다면... 그때는... 이 아빠는...


저 앞에서 한 줄기 빛이 어른거리며 다가온다. 번쩍이는 랜턴을 들고 성큼 다가오는 큰아버지.

서둘러 다가와 장우산을 활짝 펼쳐 부자의 머리 위로 씌워준다.

뒤따라 다가온 큰어머니는 호에게 업힌 윤을 건네받아 양팔에 안고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마당 구석에서 기르는 까만 털이 드문드문 섞인 누렁개가 낯선 이들을 보고 눈치없이 짖어댄다.


- 이 잡것이 짖을 때는 안 짖고 이제서야 지룰하고 있네.

큰아버지가 개를 걷어차는 시늉을 하자 깨갱 하고는 개집 안으로 숨어 이쪽을 흘겨본다.

워매, 워매, 이 밤중에 얼마나 고생했을까.. 어쩔까나...

우리 윤이도 물에 빠진 생쥐처럼 이게 뭐꼬... 퍼뜩 들어가자.. 시숙도 어서 들어와~

- 예, 예.

- 오메~ 뭔 놈의 비가 이리 지랄 맞게 내린다냐. 어여 들어와. 어여...

감기 걸리지 않게 수건으로 닦아야 쓰겄네. 옷도 갈아입어야겄어.

워매, 물을 그냥 한 다라 쏟아부렀나 보네.


아이를 대청에 앉히자마자 젖은 짚단이 풀썩 쓰러지듯 누워버린다.

호는 그 옆에 앉아 열린 대문 밖, 넘실대는 논자리를 말없이 바라본다.

애인의 귓가를 핥아대는 사내의 혓바닥처럼 빗무리는 쉬지 않고 지상의 모든 것을 훑어내린다는 걸,

마침내 깨달은 듯 했다.


- 이거 받아요. 영산포역에서 사 가지고 온 건데, 젖은 상자만 내버리고 약주로 드소.

- 거참, 빈 손으로 오지. 이 험한 날씨에 뭘 가져온다고...


큰아버지는 과묵한 손길로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 너덜해진 백화수복 선물세트를 받아 마룻바닥에 내려놓는다.


- 그나저나 자네 신발 한쪽이 없네. 건너오다가 어디서 벗겨졌나 보네 그려.


호는 그제야 자신의 왼발을 내려다본다.

축 쳐진 양말의 본래 색은 잃어버린 지 오래, 온통 황토색으로 물들었다.

짝 잃은 오른쪽 구두는 산 지 두 달도 안된, 새 구두였지만 사방팔방을 쏘다닌 장돌뱅이의 신발처럼

엉망으로 구겨졌다.


- 어이, 동생. 그 구두 벗어놔. 아궁이 불가에 세워두면 금방 마를거야.

나머지 한쪽은 내일 아침에 날 밝으면, 저 아래 내려가 찾아봄세.


곁에 누운 아이는 숨을 죽인 채 눈을 감고 있다.

어떻게든 물에 닿지 않게 하려 아이를 들쳐멨다가 안았다가, 업고서 저 길을 올라온 덕분에 흠뻑 젖었을 뿐, 어디 다치거나 뭔가를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


- 평상시엔 저기서 올라오면 바로 큰집인데, 통 뭐가 보여야 걸어 올라오지

쌩 논바닥을 건너올 줄이야. 하마터면 불어난 물에 떠내려 가는 줄 알았소.

- 서울서 여기까지 내려오는데 솔찬히 고생 많았네. 좀 쉬게나.

그나저나 저녁은 들었나 모르겠네. 어디 뭐라도 차려줄까?

- 아이고, 밥 생각나지도 않아요. 기차간에서 이것저것 먹었더니, 배도 안 고파.

시원한 물 있으면 한잔 주소.


슬레이트로 덧댄 처마를 때리는 빗줄기 소리의 엇박자가 살짝 느려진다.


"처음 윤을 데리고 나주 큰집에 내려온 날, 이런 추접스런 일을 겪다니...

뭔가 안 좋은 일 앞두고 액땜했다 여겨야 할는지..."

호는 허공에 혼잣말을 던지고는, 점차 잦아드는 빗발을 노려본다.

아이는 방금 헹굼을 마친 빨랫감처럼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을 일으켜 아빠의 널따란 등에 머리를 기대곤

깊은 한숨을 뱉는다.


여기가 제일 큰집이다. 나주 큰집...
이 집 뒤로 올라가면, 우리 나 씨 문중 선산이 있지.

잠긴 목소리가 점차 흐려지고, 아이는 선잠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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