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 '팥파이스'를 시작점으로 일대 해변을 시계 방향으로 돌면 원통형 전망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깎아지른 절벽 끝에 위치하여 멀리 한려해상공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남해 보물섬 전망대'에 도착해 건물 2층으로 올라간다. 간단한 음료나 디저트를 주문할 수 있는 카페는 주위 바다를 360도 조망할 수 있는 통유리로 둘러싸여 있다.
실내는 몰려든 인파로 버글버글하다. 편히 앉을자리를 찾기 쉽지 않다. 테이블을 차지한 이들은 커피를 즐기기보다는 창 너머 바다 풍경을 즐기기 바쁘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카페보다는 '외줄 스카이 워크'를 즐기려 함이 대부분이다. 이 전망대는 단순히 실내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것 외에 이색적이고 아슬한 즐길거리를 제공하여 인기를 끌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창 밖에는 안전복을 걸치고 외줄에 매달린 이들이 투명한 유리 통로를 천천히 걷는다. 스릴을 즐기는 누군가는 유리길 끄트머리에 발끝을 지탱하고는 무게중심을 바다 쪽으로 기울인다. 유격 훈련 시에 종종 체험하는 현수 하강 자세다. 외줄에 몸을 맡긴 채,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뒤돌아 추락하려는 모양새다.
액티비티에 도전한 커플들은 카메라봉을 길게 늘여 셀카를 찍기 바쁘다. 고공이 두려워 실내에 남은 몇몇 이들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는 바깥 일행의 사진을 남긴다.
"아빠, 같이 할 거야?"
솔과 연이 주위를 두리번대는 내게 묻는다.
사실 난 어려서부터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무서워했다. 심각한 고소 공포증을 앓고 있다고 해야 하나.
오죽하면 서울 시내의 육교에 올라 그 위를 걷거나 난간 너머를 바라보는 것도 심히 조심스러웠다. 누구는 후천적인 노력과 반복적인 경험으로 두려움이 완화된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
튼튼한 철제 난간이 깎아내린 측면을 감싸고, 강화 유리판이 발밑을 지탱한다 해도 까마득한 저 아래를 바라보기가 두렵다. 절대 아래를 보지 말자. 전방만 주시하자 되뇌며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해도, 절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스텝이 꼬인다. 눈앞이 까매지고 어질어질, 그동안 먹은 것을 몽땅 게워낼 것만 같다. 가족들과 함께한다 해도, 외줄이 내 몸을 구한다 해도 낭떠러지가 훤히 보이는 하늘길을 걷는다는 생각만 해도. 우웩.. 속이 메스껍고 울렁대는 걸 어쩌나.
"아빠는 이 안에서 너희들 사진 찍어줄게.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에이, 아쉽다. 그럼 엄마하고만 해야 하는 거야?"
"다음에 같이 할게. 아빠가 약속!"
아이들은 다소 실망한 눈치다.
(여보, 부탁해. 나 높은데 무서워하는 거 알지?)
난 아이들 눈길을 피해 작은 목소리로 아내에게 소곤거렸다. 다행히 그녀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아이들에겐 아빠가 높은 곳을 꺼려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지는 못했다. 그러면 아이들도 미처 깨닫지 못한, 마음 깊은 곳에 웅크린 두려움이 알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그것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영역을 넓혀 아이들의 온몸을 휘감을지도 모르니까. 고소 공포증은 나 혼자 겪은 것으로 충분했다.
등산용 하네스에 카라비너를 주렁주렁 걸친 아내와 아이들이 안전화를 신고 밧줄에 매달릴 준비를 마쳤다. 밖으로 나가 대기 줄에 선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참여자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가이드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전망대 외벽을 따라 설치된 유리 데크를 걸어가는 그들이 보인다. 나도 걸음걸음 보조를 맞추어 간유리 안쪽에서 따라간다. 언니 솔은 탄탄한 평지를 걷는 것처럼 거침없이 앞장을 선다. 유리판 가장자리에 성큼 다가서서는 고개를 쑤욱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한 팔을 공중으로 내밀어본다.
난 상상도 못 할, 어림없는 과감한 행동이다. 설사 내가 용기를 내어 저 액티비티에 도전했다 하더라도 점점 사지가 움츠러들고, 쭈뼛한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당황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안으로 뒤로 몸을 피하고 숨으려 했으리라. 마치 앞선 언니를 엉거주춤 뒤따르는 저 아이처럼..
둘째 연은 점점 발걸음이 느려졌다. 초반에는 멋모르고 히죽거리며 걷다가 어느 순간 유리판 아래를 내려보았나 보다. 그 후로 시선 처리가 불안정하고 내딛는 발걸음이 부쩍 신중해졌다. 옆에 선 엄마의 허벅지를 부둥켜안고 늘어지기 일쑤다. 아이는 유심히 지켜보는 유리벽 안쪽의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양손을 교차하여 X 자를 그린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불가'의 표시다. 곁에 엄마가 없었다면 아이는 버티지 못하고 뒤로 돌아서거나, 속절없이 주저앉았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 이 고난에서 구해줄 때까지 엉엉,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틀림없는 어릴 적 내 모습이다. 유사한 공포심의 존재 측면에서 연은 날 닮았다. 높은 곳에서 하릴없이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이렇게 대를 이어 맥을 잇는다. 저 아이도 잠결에 뭉게구름 끝에 서서 끝을 모르는 미끄럼을 타는 꿈에 자주 들까. 그 꿈의 말미, 허우적대며 허공을 다이빙하는 아찔한 공포에 온몸을 떨고 소스라치게 놀랐을까? 새벽녘 문득 잠에서 깨어 서글피 울다가 화장실을 찾는 것이 그런 연유 아니었을지..
뒤늦게 마음 한구석에 가느란 주름 하나 잡힌다.
그럼에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머뭇머뭇 뒤돌아보거나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불안스레 바라보는 아빠의 눈길을 애써 모른 척한다. 연은 곁에서 버티는 엄마를 지지대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짓궂은 가이드 아니 시범 조교는 겁에 질린 이의 외줄을 잡아 흔든다. 심지어 낙락한 절벽 끝으로 홱, 밀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때마다 자지러지는 꺄악, 새된 비명에 암벽 끝에 앉은 외갈매기 놀라 위로 용솟음친다.
원형 유리길 어중간에 다다라 아내와 솔은 조교의 설명을 귀담아듣고 동작을 따라 한다. 그들은 유리 발판 끝을 디디고 안쪽을 바라보며 레펠 하강 자세를 취한다. 곧이어 둘은 한 손으로 V 자를 그리며 포즈를 취한다. 난 건너 유리창 안쪽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그들을 사진에 담는다. 연은 멀찍이 앉아 그들을 바라본다. 자신이 걸친 조끼 고리에 연결된 외줄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지만 표정은 한결 여유롭다.
잠시 후, 전망대 외벽 투명 데크길을 외줄에 의지하여 지나온 그들이 환하게 웃으며 실내로 들어온다.
"아빠는 이럴 줄 알고 안 한 거죠, 맞죠?"
연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날 보자마자 따지듯 묻는다.
"아빠가 지금 속이 안 좋아서.."
"저도 아까 처음에는, 멀미하는 것처럼 토할 거 같고 그랬어요."
"지금은 괜찮아?"
"네, 괜찮아졌어요."
아이는 씩씩하게 답하고는 의자에 앉아 안전 조끼와 신발을 벗어던졌다.
"연아, 나중에 비슷한 스카이 워크나 번지 점프할 기회가 있다면.. 할 수 있겠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넌지시 물었다.
"솔직히.. 못 할 거 같아요."
"만약에 아빠가 너와 같이 한다면.. 어때?"
"으음.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겠지만.. 너무 가슴이 떨리고 쿵쾅대서 고민될 거 같아요."
연은 잠시 망설이다 내게 물었다.
"저 아빠 닮은 거 맞죠? 언니랑 엄마는 저 밖에서 안 무서워하던데.."
"글쎄, 그런 거 같다."
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저도 아빠랑 안에 있을래요. 언니랑 엄마 높은 데서 즐기는 거 사진 찍고 그럴래요."
연은 싱긋 웃고는 뒤돌아 엄마 곁으로 향한다. 아내는 카페 계산대에 서서 나름 유명하다는 '유자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있다. 난 잠시 폰을 만지작대다가 그들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