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의 천국으로 오라, 팥파이스

남해 여행기 #2

by 라미루이





완만하게 휘어지는 지족 삼거리를 지나 창선교를 건넌다.

수협을 바라보고 좌회전하면 멸치쌈밥을 주메뉴로 내세운 몇몇 식당들이 눈에 띈다.

멸치 쌈은 아이들이 손사래를 치며 절대 안 된다고 극구 사양해서 다음을 기약하며 지나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팥파이스'라는 간판 글이 시원한 통창 위벽에 새겨진 건물 앞에 주차한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5일 오전에 처음 들렀는데 사장님이 문을 걸어 잠그고 외출 준비를 하는 게 아닌가? 설마 설마, 급한 일이 생겨 문을 닫는 게 아닐까 싶어 "오늘 오픈하시나요?" 물어보니 역시나.. 서글한 인상의 사장님은 자신도 아이들이 있다며 어린이날이라 가족 나들이를 가야 한단다.

뭐 어쩔 수 있나. 아이를 돌보는 같은 아빠 입장에서 그의 하루 쉼을 적극 지지할 수밖에. 동행한 솔과 연이 여간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지만, 다음날 재방문하기로 굳게 약속하고 발길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서니 온화한 목질의 라운드 테이블과 의자 여럿이 줄지어 놓여 있다. 화이트 톤의 내벽과 높은 천장이 깔끔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동그란 파이 겉 테두리가 감싸는 이미지의 상호는 친숙하다. 오래도록 기억할 만한, 입에 착착 감기는 이름이다. 메뉴는 단출하고 가격은 부담 없다. 뭘 시킬까 고민할 필요 없이 종류 별로 다 시켜서 맛보면 된다.


팥파이, 팥빙수 그리고 아메리카노. 팥죽은 겨울에 맛볼 수 있단다.

팥 알갱이가 가득 덮인 빙수와 한가운데 올린 큼지막한 인절미 고명은 밀탑의 그것과 닮았다. 인색하지 않게, 푸짐히 올린 팥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위아래로 골고루 섞는다. 스푼 가득 떠서 먹으면 씹는 맛이 살아있는, 팥알의 식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너무 퍼져서 뭉개지지 않게, 그렇다고 껍질이 입안에 남을 정도로 딱딱하지 않도록 적당히 익힌 내공이 느껴진다. 얼음 또한 맹맛이 아닌, 달큰하고 진한 맛이 감돌도록 연유를 섞었다. 빙설의 질감은 너무 곱게 갈아 쉬이 흩녹지 않게, 적절한 굵기로 분쇄해 오독오독 가볍게 씹는 느낌을 주었다. 이 정도 맛과 정성에 가격은 반값, 착하기까지 하니 두세 그릇은 연달아 뚝딱 해치울 수 있을 듯하다.



입안이 차서 얼얼하다 싶으면 팥파이를 한 조각 잘라 맛보길 바란다. 국내산 팥과 유기농 밀가루로 만들어 퍽퍽하지 않은, 바삭하고 달콤한 파이의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자상한 아빠가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 집에서 손수 만든, 정성이 듬뿍 담긴 홈메이드 파이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다. 목이 마르면 팥빙수를 한 술 떠서 천천히 녹여 먹거나,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켜면 바로 해결이다.


어느새 오목한 황동 그릇과 흰 접시는 바닥을 드러냈다. 아이들은 빈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날 바라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는다. 한 그릇 더? 잠시 갈등하던 내가 입을 열자 아이들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난 재차 계산대로 향했다. 사장님은 이해한다는 듯 은근한 미소를 남기며 뒤돌아 빙수를 만들기 시작한다.


한참이 흐른 후에야 우리는 '팥의 천국'을 떠날 수 있었다. 쨍한 한낮 무더위가 잠시나마 꺾인 듯싶다.






http://kko.to/ATovJx212


팥이 흘러넘칠 정도로 푸짐한 팥빙수. 이 정도 퀄리티에 가격이면 두세 그릇은 연달아 뚝딱, 해치울 수 있어요!



'팥파이스' 실내에 걸린 그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