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과 연은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킥보드를 타고 오른다. 산 중턱에 다다르자 중력을 이기지 못한 킥보드가 힘차게 오르지 못한다. 한낮 뙤약볕에 오르막길이라 아이들이 힘에 부치는가 보다. 중간중간 아내와 내가 킥보드를 끌고 오르기도 한다. 내리막이 아닌 비탈진 오름길에서 킥보드는 천덕꾸러기, 무거운 짐 신세가 되곤 한다.
평지에 이르러 아이들에게 킥보드를 넘겨주었다. 아이들은 한쪽 발을 구르며 속도를 높인다. 겨우 숨을 돌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정읍사 문화공원', 이름대로 정읍사를 대표하는 상징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멀리 좌측 고지대에 꼿꼿한 허리를 곧추세운 아녀자가 보인다.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장사치 남편을 하염없이, 애타게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비련의 주인공이 틀림없으리라.
중도의 잔디밭에 기나린 휘장이 기대어 있다. 리듬에 맞추어 휘갈긴 글씨체로 노래 가사가 길게 적혀 있다. 유난히 큰 필체로 쓰인 "달님아, 높이금 돋으사!", 어언 삼국 시대를 거슬러 백제의 국민가요이자 한글로 표기된 가장 오래된 노래인 <정읍사井邑詞>의 첫 구절이다. 이어 익히 알려진 후렴구가 귓가에 들린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낙담하여 자포자기하다시피 전신에 힘을 빼고 혓말을 공글린다.저 아낙은 휘영청한 달밤에 높은 언덕에 올라 정든 님을 기다리며 이 노랫말을 끝도 없이 되뇌었겠지. 끝끝내 돌아오지 않는 이에 대한 그리움 아니, 원한이 사무쳐 온몸이 돌로 굳어졌으니. 그 혼은 원통함이 극에 달해 소천하지 못하고 지상에 남아 당신 주위를 맴돌았겠지. 이후 무심한 당신은 밤이면 밤마다, 원혼이 가득한 망부亡婦들의 무덤가를 헤매는 꿈결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리라. 그네들의 귀를 찢는 대성통곡에 고막이 뚫리고, 철철 흘리는 피눈물 수렁에 눈깔이 파묻히고 혀가 잠기니. 제발 가지 말라 여기 머물라, 지하에서 뻗은 덩굴손에 발모가지 잡혀 영영 깨지 않을 환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서서히 거죽만 남아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순간. 옛적 그녀의 어여쁜 얼굴, 보름달처럼 떠올라 늙은이 탁한 눈동자에 비쳤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했으리라.
공원을 지나 지그재그로 뻗은 길을 오른다. 아직 멀었나, 위를 바라보니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가로등마저 운치가 넘친다. 창공으로 휘날린 오색 단풍잎과 홍사 초롱을 든 아낙네라니..
해 저물어 땅거미 깔리는 늦오후,
줄지은 초롱불 하나둘 떠올라
한가을 수북한 단풍길 밝히면
사랑하는 이와 어깨 맞대어
들뜬 눈 맞추고 산책하기 좋겠다 싶다.
아양산 중턱에 다다르면 별천지가 펼쳐진다. 아이들은 오오, 이게 뭐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기다란 터널 미끄럼틀, 투명 나무집, 구름다리를 비롯한 온갖 놀이터가 아이들을 반긴다. 이리저리 기우뚱대는 흔들 다리를 건너면 정체불명의 '그물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솔과 연은 망설임 없이 본능적으로, 그 안에 이끌리듯 들어갔다. 복층으로 이루어진 그물망 안은 전체가 거대한 트램펄린이자 미끄럼틀 그리고 쉼터였다. 아이들은 맨발로 성긴 그물 위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넘어지고는, 몇 번이고 일어나서 방방 점프했다. 그러다 숨이 차오르고 지치면 푹신한 바닥에 누워 편히 쉬었다. 천장을 뒤덮은 그물눈 사이로 비치는 쨍한 하늘을 한참 바라보면서 말이다. 서너 살 갓 지난, 걸음이 서투른 아이부터 멀대같이 키가 자란 고학년 아이들까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얼굴 반은 마스크로 가렸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만은 막을 수 없었다. 모두들 한결같이, 일체의 흐림 없는 저 하늘을 똑 닮은 밝은 낯빛이었다.
구석에서 휘청이는 갓난아이는 그물코에 발가락이 걸려 아코야, 기어코 넘어진다. 밖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괜찮아, 이를 어째? 걱정을 내비친다. 하지만 아이는 방긋 웃고는 두 주먹으로 버티고 양 발에 힘을 준다. 꺄아아, 난데없는 샤우팅을 내지르고는 다시금 일어나 아장아장 걸음을 옮긴다. 그러고는 얼마 못가 엉덩방아를 찧는다. 안에 들어갈 수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부모와 이를 아랑곳 않고 방방 뛰노는 놀이에 흠뻑 빠진 아이들. 이 얼마 만인가? 맘껏 노느라 무아지경에 빠진 아이들의 벌겋게 달아오른 뺨과 귓불을 보는 것이.. 또래 친구들끼리 부둥켜안고 씨름판을 벌이다 둘이 풀썩 자빠지곤 으하하, 깔깔! 폭소를 터뜨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근 2년 만인가? 실로 오랜만이다. 코로나 유행 이후로 이런 야외 놀이를 마음껏 즐겼던 때가 있었나 싶다. 지칠 줄 모르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나 또한 절로 마음이 밝아지고 어려진다.
아이들이 꼽은 원픽 최애 놀이터. 거대 그물집 트램펄린이자 쉼터.
굴뚝 사다리, 자벌레 놀이 등 정겨운 우리말 놀이터를 즐기는 아이들.
흔들 다리 주위를 감싼 짙은 녹음을 보라!
두 시간 아니 세 시간쯤 지났을까? 그제야 아이들이 지쳤는지 다른 데로 가자 한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자 한다. 내려가는 길은 킥보드를 타기 수월하다. 꽤나 흥미진진하다. 스릴 넘치게 킥보드를 타고 스키 활강하듯 내려가는 아이들에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하고 소리쳤다. 중간에 '아양쉼'이라는 간이매점이 나타나 잠깐 숨을 돌리기로 한다. 솔과 연은 꽁꽁 얼어붙은 슬러시한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조몰락거려 녹이더니 날름 쫍쫍, 해치운다. 냉한 빙수를 쥐여주자 무더위와 열기로 불그레 달아오른 아이들의 얼굴이 겨우 멀게진다.
정상에서 내리 부는 산바람에 갖은 아양을 떠는 수목들이 잔가지를 바르르, 털어낸다. 지상에 드리운 그들의 짙은 그늘이 늘어질 즈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숲과 공원을 빠져나왔다.